서리풀 논평

누구를 위한 ‘노동공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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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이름이 고용노동부로 바뀐 때부터 알아봤다. 노동은 뒷전으로 사라지고 고용, 즉 일자리만 살아남은 것이 현실이다. 곧 다가올 대선에서도 노동은 언 발에 오줌 누기 정도, 단연 일자리가 초점이다.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는 선동성 구호가 힘이 세다.

일자리? 당연히 중요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자리를 얻어 월급, 일당, 시급으로 사는 것은 숙명과도 같다. 누가 이 운명을 피할 수 있으랴. 일자리를 잃는다는 ‘협박’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한 줌에 지나지 않는다.

사태가 이런 바에는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는 주장이 ‘먹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일자리를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유지하겠다는 약속이 정책이 아니라 정치인 것도 당연하다. 이때 정치는 시대에 맞추어 특수한 형태로 발현된다. 일자리를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도 희생하라고 강요하는 이 시대의 노동 정치.

 

고유한 노동 정치는 성공했으니, 노동은 앞뒤, 아래위가 완전히 바뀌었다. 누군가 상상한 노동의 유토피아에 이른 것도 아니건만, 노동은 그 자체로 고귀한 목적이 된 것처럼 보인다. 몸과 마음이 어떻게 되든 말든, 가정과 생활이 어떤 영향을 받든, 무슨 일의 보람이나 행복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우리는 그 노동과 그 일자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희생해야 한다.

 

이 시대 노동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도덕은 신격화된 노동의 산물이다. 여가와 놀이, 휴식은 본래 가치이자 목적이었으나 이제 노동을 위한 ‘재충전’ 수단이 되었다. 몸과 마음을 다시 충전하여, 그는 더 건강한 노동자가 되어야 하고, 그의 노동은 더 많은 생산에 기여해야 한다. 나아가, 일하지 않을 때조차 그런 노동자가 되기 위해 준비를 게을리 하면 안 된다.

 

대통령 선거를 맞아 후보와 주자들이 내놓은 공약은 정확하게 이런 노동의 틀 안에 있다. ‘현실성’을 추구하는 한, 앞으로도 이런 패러다임을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또는 다른 차원에서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는 현실성이 있는가?

 

먼저, 노동과 삶의 역전을 되돌려 회복할 수 있는지 묻는다. 자본주의가 발흥한 이후 노동과 일이 인간과 삶보다 우위에 있도록 ‘통제’하는 것이 노동 정치의 핵심이었다면, 역전은 해방을 상상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노동과 일을 객관화하고 상대화하는 것.

장시간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체제에서 좀 더 느슨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체제에 통합된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은 노동자에게는 자유를 뜻하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통제력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제는 노동을 넘어 삶과 생활, 개인의 내면에 이르는 넓은 것이었다.

 

“시장질서의 외부에서 누리는 날마다의 휴식 같은…활동은 산업 문화와 시장질서에 직접적으로 위협이 되었다. 자유 시간은 현대적 노동 규율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동시에 일터 외부에서 누릴 무언가를 향한 자유를 의미하기도 했다. 노동, 구매, 소비의 시장질서와 고용주, 상사, 광고업자, 전문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는 자유말이다.” (벤저민 클라인 허니컷 지음, 김승진 옮김. <8시간 vs 6시간>, 이후 펴냄. 102쪽)

 

한국 사회에서 이런 노동을 말하면, 엄중한 현실을 모른다는 답이 돌아오기 마련이다. 오늘의 경제, 일자리와 실업, 냉정한 노동과 삶의 조건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 대통령 선거와 이에 필요한 공약이 가장 두려워하는 평가가 ‘탁상공론’이라면, 현실론 때문에 한 걸음도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남은 길은 현실의 제약을 인정하되 노동 정책(이를 하려는 공약)의 목적을 역전하여 본질에 다가가는 것, 그리고 그에 기초하여 현실의 앞뒤, 아래위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혹 같은 결론에 이를지 모르고, 정책 수단이 비슷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질문이 다르면 경로가 바뀌고, ‘악마적 디테일’의 결과가 다를 수밖에 없다.

 

노동과 노동자(그리고 그 몸)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강조한다.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건강하고 행복한 노동이 되려면 노동과정과 조건, 그 구조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어떤 정책이 어떻게 행복한 노동에 봉사할 수 있나? 그런 노동을 위해 경제와 산업정책을 어떻게 ‘조정’해야 할 것인가?

 

 

첫째,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을 보장할 것. 그 악명 높은 산업재해(직업병을 포함)가 중요 의제가 되지 못하는 것이 노동 정치와 정책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주요 대선주자의 일자리-노동 공약에 대해서는 다음 기사를 참조. 바로가기).

 

“노동을 해야 살 수 있는 사회에서 노동 때문에 목숨과 건강을 걸어야 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먹고 살기 위해서 다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역설은 사라져야 한다. 비정규직 노

동자의 안전과 건강만큼은 원청 사업주가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하며, 위험한 업종이나 직종은

외주화를 금지해야 한다.“(시민건강증진연구소. <2016시민건강실록>. 바로가기)

 

적어도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이면, 산재를 줄인다면서 내놓은 정책들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리라. 그런데도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에 별 다른 관심이 없는 것은 노동 공약이 그만큼 ‘비현실적’이라는 뜻이다. 무엇인가 다른 정책과 가치를 위해서는 건강과 생명 얼마는 희생할 수도 있다는, 가치의 끈질긴 뒤집힘.

 

둘째, 노동시간 단축. 산재만큼이나 악명 높은 장시간 노동을 해결해야 한다. 두 말할 것도 없다. 더 우선되는 가치, 즉 여가와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건강하고 안전한 노동을 위해서, 수단이자 도구인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국가 순위를 올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여러 관련 정책이 함께 이런 본질적 가치에 봉사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노동시간 단축에는 최저임금을 비롯한 임금 인상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일자리 만들기나 일자리 나누기도 마찬가지. 장시간 노동을 줄이기 위해 여러 정책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셋째, 비정규 노동(자) 대책.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같은 임금을 받아도 비정규 노동자가 덜 행복하고 더 아프며 건강이 나쁜 이유다. 소득보다 안정감, 소속감, 자긍심, 보람 같은 것을 더 높은 가치로 여기는 사람도 많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만으로는 사람으로서의(그리하여 부모, 자식, 친구와 친지로서의) 노동자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사람이 왜 일을 하는지 그 본질을 생각하면, 비정규 노동을 줄이고 결국은 없애야 한다.

 

이런 ‘좋은’ 노동을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되물을 것이다. 그게 가능하냐고? 제4차 산업혁명, 새로운 산업구조, 또는 한국이 처한 국제 경제환경을 운운하면서 ‘노동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 되풀이 하는 질문이다(기사 바로가기),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그런 개혁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실체도 없고 목적어도 불명확한 발전과 성장, 경쟁력, 경제라면, 그런 개혁의 종착점은 필시 소수 특권층(집단이나 계급이라 불러도 마찬가지다)의 이익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냐고.

이 때문에 우리는 덧붙여 노동(자)의 ‘참여’를 주장한다. 참여는 결과를 더 좋게 하는 수단이면서, 그 자체로 의미이자 가치다. 참여가 건강을(도) 좋게 한다는 연구결과가 한둘이 아니라면, 참여는 그 자체로 노동자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이 틀림없다.

 

대선 주자 가운데에 정의당의 심상정 의원만이 참여에 해당하는 것을 공약에 포함했다. 바로 노사공동결정제도(기사 바로가기). 이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비단 기업 단위에서만 참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야 하겠다. 정치와 정책 수준에서 참여할 수 있어야 기업과 작업장에서도 참여할 수 있다.

 

첨언. 이 글을 작성하는 동안,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한 연구원이 발표한 저출산 대책이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정확하게는 비판이 대부분이다)(보도자료 바로가기, 언론보도 보러가기). 불필요한 스펙 쌓기를 막고 여성의 하향선택결혼을 촉진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논지에다, 이를 위해 ‘음모’ 수준으로 문화 컨텐츠를 개발해야 한다니 황당하기 짝이 없다. 저출산 대책이 필요한가도 의심스럽지만, 이 수준으로는 어떤 대책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다만, 오늘 주제를 상기할 때 노동을 바꾸지 않고는 더 가망이 없다는 것을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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