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정치는 우리에게 이미 익숙하다. 대표적인 것이 녹색당이다. 독일 녹색당은 비록 연정이지만 집권 경험이 있고, 2011년에는 역사상 최초로 주정부를 장악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1980년대 말부터 녹색당을 만들려고 하는 시도가 계속 되었고, 이번 총선을 앞두고 다시 녹색당이 창당되었다. 총선에서 당이 해산되지 않을 정도로 표를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해산되더라도 재창당에 나서겠다고 하니 앞으로도 이런 시도는 계속될 모양이다.
녹색당과 같은 ‘전업’ 정당이 아니어도 녹색의 가치를 내세운 정당은 많다. ‘적녹동맹’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진보정당이 더욱 적극적이다. 한국에서도 진보신당이 총선 이후에 녹색당과 통합을 모색한다고 할 정도로 진보와 녹색의 친화성은 강하다. 중도와 보수 정당도 어느 정도까지는 녹색의 가치를 거부하지 않는다. 한 때 한국 사회에 널리 퍼졌던 “지속 가능한 성장”이 중도와 보수까지 설득한 대표적인 녹색 담론이라 하겠다(그러나 녹색 성장의 녹색은 녹색 정치나 녹색당의 녹색과는 그리 가까운 것 같지 않다).
최근 들어 정파에 관계 없이 녹색의 가치가 강화되고 있는 것은 녹색 정치의 지향이 그만큼 보편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녹색 정치의 지향점은 전세계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의 경우 녹색당의 홈 페이지를 참고하면(http://kgreens.org), 탈핵과 에너지 전환, 농업 살리기, 풀뿌리 자치, 생명권, 인간다운 노동, 여성-소수자-청년을 위한 정치를 내세운다. 전세계적으로도 녹색 정치는 환경, 사회정의, 풀뿌리 민주주의, 비폭력 등을 주요 이념으로 한다. 이 중 몇 가지는 논쟁적인 것도 있지만 하나하나 지향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쉽게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형태야 어떻든 녹색 정치는 더욱 활성화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관심은 건강, 그 중에서도 ‘녹색 건강’의 가능성이다. 녹색 정치의 중요성에 비추어 보면 건강에서 녹색 담론은 소극적인데다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몇 가지를 제외하면 말부터 익숙하지 않다. 일반인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환경이나 생태적 삶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다(그것도 주로 개인 차원에서). 탈핵, 반핵의 논리도 건강에 관한 한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이 보통 사람들을 가장 잘 설득한다. 보건의료에서도 이명박 정부의 녹색 성장 드라이브에 발맞추어 녹색, 그린 의료가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지만, 에너지 절약, 폐기물 처리, 친환경 소재를 강조하는 정도였다. 급기야 녹색의료관광이라는 형용모순에 가까운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이 정도가 되면 녹색이 아니라 녹색의 탈을 쓴 성장론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벌써 많이 오염되긴 했지만, 녹색과 생태의 지향에 부합하는 ‘녹색 건강’이나 ‘녹색 보건의료’를 우리의 삶과 우리 사회의 원리로 정립할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다면 무엇이 핵심일까. 우선, 2010년 한국한의학연구원이 펴낸 홍보물에 들어있는 표현을 보자. “세계는 지금 기존의 고비용, 고자원, 병원 중심, 약품, 수술, 격리, 전문가 중심의 ‘적색 의료(Red Medicine)’에서 저비용, 저자원, 고효율, 비침습, 천연물, 친환경, 소비자 중심의 녹색 의료(Green Medicine)로 패러다임의 진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녹색 성장 드라이브가 한창인 때였다는 것은 마음에 걸리지만, 내용만을 떼어서 보면 매우 중요하고 논쟁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고 하겠다. 자원을 적게 쓰고 전문가보다는 소비자 중심이라는 내용을 특히 주목할 만하다. 대체로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공감할 부분이 많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녹색 의료’라는 말에서도 드러나듯이, 이런 패러다임은 여전히 ‘의료’의 생산방식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예를 들어 소비자 중심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여전히 의료인 한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지향은 쉽게 충족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녹색 건강의 바람직한 지향은, 다시 논쟁적일 수 있지만, ‘건강레짐(health regime)’을 다시 설계하는 것이다(‘레짐’이라는 말이 썩 만족스럽지 않지만 다른 대안이 없어 그대로 쓴다. 여기에서 레짐은 규범이나 가치, 문화, 정책, 제도, 법률을 포함하며, 과업, 의무, 권리를 배분하는 규칙으로 작용하는 틀을 말한다). 녹색 건강을 위한 건강레짐은 기본적으로 (모든 측면에서) “지속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녹색의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녹색 건강은 자원을 절약하고 환경 친화적이며 소비자 중심의 의료에 국한되지 않는다. 예방과 건강증진, 치료, 요양의 모든 국면에서, 그리고 개인과 사회, 시장과 국가를 아우른 범위에서 녹색의 가치를 구현하는 건강과 보건의료를 구성할 때 녹색 건강이 성립될 수 있다. 생태적이고, 사회정의에 부합하며, 민주주의적으로 참여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하나의 건강레짐이라 해도 좋다.
의학기술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인간의 수명도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는 상황에서 ‘녹색 건강’의 의미는, 특히 건강의 가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오해와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녹색 건강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건강이 이기적 소비와 탐욕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과 공생, 평화, 사회연대 속에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보태는 말. 곧 다가올 총선에서 녹색 정치를 표방한 정당(정파)들이 좋은 성과를 거두기 바란다. 그리고 정치적 논쟁 속에서 녹색 건강의 가능성도 새롭게 조망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