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부터 이번 주 초반까지가 여름 휴가의 절정이란다. 길거리 식당과 가게도 드문드문 휴가를 알리고, 학원과 전자상가도 쉰다. 이 <논평>도 때맞추어 휴가를 다루기로 한다. 더 가치 있는 주제를 쉬고 틈에 가볍게 다룬다는 뜻은 아니다.
익숙한 말은 피하고자 한다. 한국 사람들이 너무 오랜 시간 일한다느니, 적절한 휴식과 휴가가 필요하다느니, 이런 말은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 건강이 어떻고 생산성이 어찌 된다는 소리도 어떤 이에게는 오히려 짜증스러울 것이다(궁금하다면 시민건강증진연구소가 낸 글들을 참고할 것. 바로가기1 바로가기2).
휴가의 ‘정치경제’가 오늘 우리의 관심이되, 대체로 휴가를 가지 못하는 이유를 둘러싼 것이다. 잠깐 살펴봐도, 이에 대한 사회적 이해는 대부분 겉핥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유라 해봐야 구구절절 따질 필요도 없이 상식이지만, 최소한의 격식은 갖췄다 할 정부 기관의 조사조차 안이하다. 7월 초 문화체육관광부가 내놓은 보도자료를 보면 ‘하계휴가 제약요인’은 이렇게 되어 있다(바로가기).
“올해 하계휴가 여행계획이 있다는 응답자는 52.1%로, 국민 10명 중 5명은 하계휴가 여행을 다녀올 계획이 있는 것…(중략)…하계휴가 여행 계획이 없는 이유로 업무, 수업, 가사일 등으로 인한‘여가 시간 및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76.7%)’를 가장 높게 꼽음. 그 다음으로 ‘여행비용 부족(16.3%)’, ‘건강상의 이유(7.7%)’ 순”
여가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같은 것으로 취급하고, 비용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분리해 놓았다. 선택지가 모호한 것은 둘째로 쳐도, 여가와 휴가를 사회체제에서 분리하여 각 개인의 능력이나 제약, 선호로 해석한 것이 큰 문제다. 휴가는 노골적으로 ‘개인화’되어 있다.
휴가가 개인의 취향 이상이란 것이 뭐 그리 어렵거나 새로운 이야기인가. 직장과 일, 경제사정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생활이고 현실일 터. 그런데도 비정규직, 빈곤, 노동 시간, 임금과 소득 등에 대해서는 어떤 문제의식도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정부의 분석을 무력하게 만드는 간단한 사례들.
“한국노동연구원의 ‘2016 비정규직 노동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정규직 근로자의 유급휴가 수혜율은 74.3%에 달했으나, 비정규직은 31.4%에 불과했다. 10명 중 7명 가까운 비정규직 근로자가 법으로 보장된 유급휴가를 사용하지 못했다는 얘기다.”(바로가기)
“A씨는 2006년 B택배회사에 취직한 후 지금까지 서울 영등포지역에서 배송을 맡고 있다. 10년 동안 한 번이라도 회사가 정한 여름휴가를 다녀온 적 있느냐는 질문에 A씨는 “아니요”라고 웃는다. A씨는 “일요일만 쉬고 임시공휴일, 선거일에도 쉬지 못했다”며 “추석과 같은 명절기간에는 일요일까지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바로가기)
“손수레에 폐지를 한껏 싣고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던 박모(71)씨는 그 자리에 서서 흐르는 땀을 닦았다. 이날 서울의 낮 최고 기온은 30도에 달했다. 박씨는 “여름마다 폐지를 주울 때면 죽을 맛”이라며 “특히 장마 기간엔 폐지가 물에 젖어 무게가 두 배 이상으로 무거워져 한 걸음 나아가는 것조차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바로가기)
여가의 결핍 또는 부족은 일부 비정규직, 일부 직종, 빈곤 노인에 한정되지 않는다. 정부 조사로도 절반이 여름 휴가를 못 간다고 하지 않는가. 한 가지 이유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개인 행태와 습관, 선호로 치부할 일은 아니다.
휴가란 결국, 고용, 노동시간, 임금, 소득을 빼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구조적 문제들의 결과물이다.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 같은 ‘변수’들도 그 뿌리는 어떤 구조에 닿을 것이 분명하다. 전적으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정치경제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휴가철의 한복판에서 휴가의 구조와 정치경제를 따지는 일이, 그리하여 ‘장기’를 논하는 일이 소용없는 일일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휴가가 노동과 임금, 소득에 연관되는 한, 그 정치경제는 늘 어떤 형태로든 진행되기 때문이다. 모종의 권력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가장 최근의 이슈는 최저임금을 둘러싼 논란, 아니 투쟁이다. 어떤 사람들과 일부 언론은 최저인금 인상으로 경제가 거덜 나고 나라가 망할 것처럼 말하지만, 그들이 절대 건드리지 않는 한 가지. 거덜 나고 망한다는 그 경제와 나라가 (꼭 찍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또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국가 경제라는 모호한 표현이나 일자리 감소라는 근거 약한 주장은 일종의 선동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누구의 삶을 귀중하게 여기는가에 따라 ‘이익’과 ‘손해’를 가르는 기준은 움직인다. (그래봐야 조금 늘어날 뿐인) 노동자의 여가는 하찮은 가치일 뿐인가?
더 많은 휴가(그리고 여가)는 분명 ‘반체제’적이다. 적어도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일을 덜 하겠다고 버티는 것은 체제를 위협한다. 개인의 ‘근로의욕’이나 ‘노동 동기’가 위험하다면, 그것이 가능한 ‘노동조건’을 요구하는 것도 체제에 반한다.
1800년대 초반 영국의 노동시간 단축 투쟁과 다르지 않다. 단지 노동시간과 휴가에 대한 요구에서 끝나지 않고 그것이 가능한 조건을 만들어내는 일. 결국, 미래의 노동이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를 둘러싼 힘겨루기다.
임금이나 소득과 같은 조건만으로 충분치 않고 여가의 본래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노동조건에 대한 요구와 연결된다). 어떤 여가인가에 앞서, 자본주의체제의 상품화한 여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더 많은 ‘체제 유지적’ 노동을 해야 살 수 있는 상품!
“기업가, 경제학자, 광고업자, 정치인들은 노동시간이 계속 줄어서 ‘일’의 사회적 위상이 떨어지게 놔두지 않았다….일이 여가에 밀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으로 현대 소비주의가 태어났고, 새로운 종류의 “필요성”이 생겼다.” (벤저민 클라인 허니컷 지음, 김승진 옮김. <8시간 vs 6시간>, 이후 펴냄. 15쪽)
어렵지만, 일과 여가의 뒤집힌 가치를 바로 잡는 일이 먼저가 아닌가 한다. 휴가가 ‘재충전’의 기회라고 흔히 말하지만, 생각하면 이상하다. 무엇이 삶의 핵심 가치인가를 따져보면, 지금은 일이 주인 노릇을 하고 여가나 휴식이 일에 봉사하는 꼴이다.
‘leisure’는 뜻이 그렇지 않다는데, 그 말을 번역했다는 ‘휴가’나 ‘여가’는 편향되었다. 여가(餘暇)는 무언가 ‘본질’이나 ‘본류’에서 벗어난 ‘나머지’나 ‘틈’에 지나지 않는다. 휴가(休暇)도 마찬가지, 지속적으로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따로 있고 잠시 ‘쉬는’ 것을 뜻한다. 알게 모르게 우리를 지배하는 말부터 이러니 헛갈릴 수밖에 없다.
일(직장과 직업)이 여가를 위한 것인가? 여가가 일을 위한 것인가? 우리는 일과 직장, 직업에 봉사하는 여가에 익숙해져 있지만, 본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일찍부터 6시간 노동제를 시험한 W.K. 켈로그의 말을 들어보자(유명한 식품회사의 이름, 바로 그 켈로그이다).
“(6시간제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주며, 생산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고, 국가적인 생산성 향상은 우리가 삶의 더 많은 부분을 삶 자체에 쏟을 수 있게 해준다는 근본적인 사실을 보여 준다.” (앞의 책, 84쪽)
좀 더 적극적으로는 여가가 일을 지배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꿈을 꾼다. 프랑스 철학자 앙드레 고르가 펼쳐 보인 ‘자유 시간’에 대한 한 가지 비전이 이에 해당한다.
“시간의 해방이 개개인과 공동체를 통해 자신의 존재, 삶의 틀, 도시 생활 그리고 자신의 포부 및 욕망 충족의 정의와 방식, 사회적인 협동 방법의 책임을 증대시킨다는 데 의미를 두어야 한다. 시간의 해방이 “이웃 간의 상호 혜택을 활성화시키고, 유급 노동과 무급 생산 활동 사이에서 새로운 균형”을 확립해주길 기다려야 한다.“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