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서리풀 연구통通’에서 매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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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권을 헌법에서 보장하면 어떤 일이?
[서리풀 연구通] 건강권 보장은 세계적 추세다
김새롬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원
1987년 9차 헌법 개정 이래 30년 만에 개헌이 이야기되고 있다. 대통령 권한과 국회의원 선거제도 등 권력구조 개편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이 기회에 헌법에서 ‘기본권’을 확장하고 심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시민들의 기대도 크다. 1천 명의 성인을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76%가 개헌에 찬성했고, 개정된 헌법에 안전, 생명, 건강, 성 평등에 대한 권리 등 기본적 권리를 강화하는 조항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93.3%에 달했다(☞관련 기사 : “정세균 국회의장실, 개헌 관련 국민인식조사 결과 발표”).
우리는 특히 건강권에 주목한다. 1948년 선포된 세계인권선언은 제25조에서 “모든 사람이 의식주, 의료 및 필요한 복지를 포함하여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녕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와, 실업이나 질병, 장애, 배우자의 사망, 노령 또는 기타 불가항력의 상황으로 인한 생계 결핍에 대한 보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함으로써 건강권의 법적 토대를 놓았다.
이후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협약(1966년), 여성차별금지협약(1979), 아동권리협약(1989), 장애인권리협약(2006),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 보호에 대한 협약(1990) 등이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기 위한 사회적 권리로 건강에 대한 권리(right to health)를 명시했다. 이렇게 국제 규약에서 건강권에 대한 논란은 크지 않지만, 개별 국가의 헌법에서 건강권은 다양한 위상을 가진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헤이먼 교수 연구팀은 191개 유엔 회원국의 헌법이 건강권을 어떻게 표명하는지 분석하여 <국제공중보건> 학술지에 논문으로 발표한 바 있다 (☞논문 바로 가기).
이들은 2011년 시점 191개국의 헌법 전문을 검토하고, 헌법에 명시된 건강권을 ① 건강에 대한 포괄적 권리(the right to health), ② 인구집단 건강을 위한 보건학/예방의학적 조치에 대한 권리(the right to public health), ③ 의료서비스에 대한 권리(the right to medical care)로 구분했다.
첫 번째 범주인 건강에 대한 포괄적 권리에서는 신체적․전반적 안녕과 건강 보호, 건강 안보, 질병으로부터 자유 등이 주된 권리 내용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포괄적 권리 규정에 대한 해석은 개별 법정마다 달라질 수 있으며, 따라서 그 실질적 영향력은 상이하다. 두 번째 범주에는 시민 건강의 보호, 예방가능한 질병의 예방, 예방 서비스에 대한 접근권 보장 등 인구집단 건강의 보장과 이를 위한 국가의 의무들이 제시된다. 마지막으로 의료서비스에 대한 권리에는 질병의 치료와 재활을 통해 시민의 건강을 회복시키고, 적절한 의료기관을 설치하며, 다양한 의료서비스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하는 국가의 의무들이 포함되었다.
연구진은 헌법의 권리 보장 수준 또한 구분했다. 건강권을 지향해야 할 목표 정도로 설정하는 것에 그치거나, 건강권 보장이 정부의 의무이기는 하지만 강제할 수는 없다고 명시하거나, 권리 행사는 국가의 자원 제약에 따라 제한되는 것이라고 한 경우 이를 ‘지향적 권리(aspirational right)’로, 헌법 조항에서 건강권을 명백히 하고 이를 보장해야 할 정부의 의무를 밝힌 경우 ‘보증된 권리(guaranteed right)’로 구분했다.
2011년 현재, 조사 대상 191개국 중 포괄적인 건강에 대한 권리를 ‘보증된 권리’로 명시한 국가는 36%, ‘지향적 권리’로 명시한 국가는 13%였다. 인구집단 건강에 대한 권리 조항을 포함하고 있는 헌법은 전체 조사 대상의 25%에 그쳤다. 2007년의 23%에 비하면 늘어난 것이기는 하지만 상승 폭은 미미하다. 이는 미주 대륙에서 가장 빈번히 언급되어 37%의 국가가 이를 보증된 권리로 보장하고, 9%의 국가에서 이를 지향적 권리로 보장했다. 국가의 경제발전 수준에 따라서도 인구집단 건강권 보장 여부가 달랐다. 세계은행의 국가소득 분류 상, 중저소득국의 30%, 중고소득국가의 29%가 이 권리를 보장한 반면, 저소득국가의 경우 23%, 고소득국가들은 18%만이 이를 언급하고 있었다. 다만, 인구집단 건강에 대한 전반적 보장을 밝히지 않은 143개의 헌법 중 65개는 건강한 환경에 대한 권리를 언급하고 있었다. 의료서비스에 대한 권리는 38%의 헌법이 보증된 권리로 분명히 언급했고, 14%는 지향적 권리로 보장하고 있었다. 의료서비스에 대한 권리를 기본권으로 보장한 헌법들 중 9%는 보편적 무상의료(universal access to free health care)를 명시했다.
이들의 분류체계에 따르면 한국의 헌법은 어디에 해당할까? 대한민국 헌법에는 건강과 관련한 조항으로 “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언급이 전부다. 따라서 포괄적 건강에 대한 권리만을 명시하고 있으며, 국민의 건강권 보장을 위한 국가의 의무를 강제하지 않기에 그나마도 지향적 권리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논문에서 언급되었듯, 건강권에 대한 헌법적 보장이 좋은 보건의료체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의료보장 체계를 갖췄지만 이를 헌법에 명시하지 않은 국가가 있는가 하면, 헌법적 권리로 건강권이 보장되어 있음에도 이를 실질적으로는 보장하지 못하는 곳도 있다.
그럼에도 건강권이 사회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권리로 구체적으로 정의되고, 헌법의 기본법 보장 조항에 명시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헌법상 기본권으로서의 건강권은, 한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보장해야 할 기본 가치로서의 “건강”과 그에 대한 국가의 책무를 규정하게 된다. 이는 건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편적 건강권 보장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며, 건강보장을 위해 국가가 어떤 책임과 의무를 져야 하는지에 대한 숙의 결과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개헌의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개헌의 과정이다. 개헌 과정은 민주적․숙의적 절차를 통해, 우리 사회가 건강권이라는 사회적 권리를 합의해가는 것이어야 한다.
헌법에서의 건강권 보장은 실용적 의미도 크다. 건강권의 법적 보장, 특히 헌법을 통한 보장은 국가 기구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극단적 상황에서도 시민의 건강에 대한 국가의 의무 이행을 강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는다. 하버드 법학대학원의 야민 교수는 인권, 특히 건강권의 실현을 위한 사법적극주의를 옹호해 온 연구자이다. 그는 2009년 발표한 논문에서 헌법 상 건강권 조항을 통해 보건의료체계의 전반적 재편을 이끌어냈던 콜롬비아의 사례를 소개한 바 있다(☞관련 논문 바로 가기). 이를 잠시 살펴보자.
콜롬비아는 신자유주의적 정부개혁의 일환으로 1993년 보건의료제도를 개편했다. 공식 부문에 고용되어 있거나 최저임금 두 배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 이들이 가입하는 건강보험 POS(Plan Obligatorio de Salud), 나머지 사람들이 정부 보조를 받으며 가입하는 POSS(Plan Obligatorio de Salud Subsidiado)로 구분되는 이중 체계를 도입한 것이다. POSS가 보장하는 의료서비스는 POS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1991년 개정된 콜롬비아 헌법은 헌법재판소를 설립하고 보호영장(Tutela, Protection Writ) 제도 등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제도를 포함하고 있었다. 1993년 보건의료 개혁 이후, 수많은 시민들의 보호영장 신청이 이어졌다. 콜롬비아 인권위원회 집계에 의하면 1999~2005년 동안 신청된 건강권 관련 보호영장은 약 33만 건이고, 이 중 80%가 승인되었다.
콜롬비아 헌법재판소는 전국 법원들에서 승인된 보호영장들을 검토하여, 첫째, 생명에 대한 권리처럼 근본적 권리와의 연관성이 명백하거나, 둘째, 아동이나 임산부, 노인처럼 취약한 집단과 관련된 사례이거나, 셋째, 보호영장을 신고하여 청구하고자 하는 서비스가 POS/POSS의 급여로 등재되어 있거나 법원이 판단하기에 필수 의료 서비스라고 인정되는 경우, 시민들이 치료비를 지불할 수 없더라도 건강에 대한 권리가 인정-강제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콜롬비아 법원은 HIV/AIDS 치료를 위한 항바이러스 제제, 고가의 항암제처럼 정부 재정을 감안했을 때 급여화하기 어려운 서비스도 국가는 여전히 제공 의무를 지닌다고 판시했다. 더 나아가 법원은 건강보험의 급여인정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2000년 POSS에 대한 예산 삭감이 건강권 보장을 명백하게 퇴행시키는 수용 불가능한 조치라는 판결을 통해 예산안 수정을 이끌어냈다. 2008년 즈음에는 건강권과 관련된 보호영장신청이 연간 9만 건에 달했다. 그러자 콜롬비아 헌법재판소는 법적 보호영장신청을 남용하게 만드는 보건의료체계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보건의료체계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판결을 내리기에 이른다(T-760/2008). 이 판결에서 헌법재판소는 정부가 헌법적 가치인 건강권 보호에 실패한 사례들을 분석하면서 2010년까지 건강보험제도를 점진적으로 통합하여 단일한 급여체계로 만들어야 하며, 이러한 과정이 참여적이고 투명하며 근거에 기반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새로운 헌법에서 사회권적 기본권들이 강화되어야 하며, ‘건강권’이 적극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관련 논평 : “개헌, 과정이 더 중요하다”). 앞서 검토한 연구들에 따르면, 건강권을 헌법적 권리로 규정하고 보다 구체적인 건강권의 내용을 명시하는 것은 세계적 추세일 뿐 아니라 실제로 시민의 건강권을 보장하고 퇴행을 방지하는 제도의 토대가 될 수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우리는 건강권이 보건의료 서비스나 의료보장제도에 대한 권리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득, 교육, 주거, 노동, 고용, 차별금지 같은 건강의 사회적 결정 요인들이 건강권 조항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라고? 노예의 해방도, 여성의 투표권도 당시에는 현실성 없는 이야기였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시민들의 저항으로 현직 대통령을 탄핵시킬 것이라고 예상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모처럼 열린 기회의 창에서, 권리로서의 건강이 무엇이고 건강 보장을 위한 국가의 의무는 어디까지인지 시민들의 토론과 숙의가 지금, 당장 시작되어야 한다.
- 서지 정보Heymann, Jody, et al. “Constitutional rights to health, public health and medical care: The status of health protections in 191 countries.” Global Public Health 8.6 (2013): 639-653.
Yamin AE, Parra-Vera O. How do courts set health policy? the case of the colombian constitutional court. PLoS Med (2009): 6:0147–50. doi:10.1371/journal.pmed.1000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