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보건의료만으론 보장할 수 없는 ‘생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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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제, 사회, 과학의 진보는 흔히 몸으로 나타난다. 몸에 새겨진다. 현생 인류가 나타난 이후 이 시대 사람은 지금 가장 잘 먹고 가장 건강하며 가장 오래 산다. ‘역사’로는 명백한 성취이자 진보임을 부인할 수 없다.

 

매일 현실을 사는 우리는 이런 진보를 실감할 수 있는가? 찰나의 시간을 쌓아 삶을 구성해야 하는 살아 있는 개인은 오히려 고통받고 좌절하는 때가 더 많다. 지구상 모든 사람이 먹고 남을 식량을 생산하면서도 10억 명 가까운 사람이 굶주리는 현실을 뭐라 설명할 것인가? 다름 아닌 몸이 드러내는 세계이자 역사, 인간 현실이다.

 

오늘 세계 곳곳에서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몸을 위협하는 지경은 진보는커녕 역사의 퇴행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인류가 노력한 결과 이제 막 ‘시민권’을 가지게 된 ‘건강’이나 ‘건강권’조차 알량한 것으로 느껴질 정도다.

 

“지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1만3,092명으로 전년보다 421명(3.1%) 줄었다….그러나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국 중 압도적 1위다…입시 지옥과 사상 초유의 청년실업 등의 여파에 10대와 20대 자살률은 각각 16.5%, 0.1% 증가했다” (관련 기사 바로 가기).

“국경없는의사회(MSF)는 43만 명의 로힝야족 난민들로 북적이는 방글라데시 콕스 바자르 난민촌에서 탈수증세로 생명을 다투는 환자가 급증했다면서 대규모 ‘보건 재앙’을 우려했다….“요즘은 매일 탈수증세로 생명을 다투는 성인 환자들이 생겨난다. 성인이 탈수증세를 일으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인데 이는 공중보건 비상사태가 임박했다는 신호”라며”(관련 기사 바로 가기)

“유니세프 북한사무소에 따르면 2011년 기준 5세 미만 사망률은 1,000명 당 33명이며, 대부분 식수와 위생시설이 부족해 폐렴과 설사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산모사망률은 10만 명 당 81명으로 조사됐다. 특히 5세 미만 아동의 28%가 영양부족으로 발육부진을 겪고 있다. 2012년 7월 홍수로 식량사정이 더욱 불안한 상황이다.”(관련 기사 바로 가기)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연인 간 폭력 사건으로 입건된 사람은 8천367명(449명 구속)으로 집계됐다. 2015년 7천692명보다 8.8% 늘어난 수치다. 지난해 연인을 살해하거나 미수에 그쳐 검거된 사람도 52명에 달했다. 2011년부터 2015년까지 233명이 연인에 의해 숨졌다. 해마다 46명가량이 연인의 손에 고귀한 목숨을 잃는 셈이다.” (관련 기사 바로 가기)

 

 

언뜻 건강과 보건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그 이상이다. 널리 퍼진 이들의 고통, 질병과 아픔, 죽음에 의사와 간호사, 병원, 약품과 의료 지원으로 대처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스트레스 해소 기법으로 10대의 죽음을 막을 수 없으며, 몇 가지 약으로 로힝야의 설사병은 멈추지 않는다.

 

북한 어린이와 산모의 생사도 더는 의료나 보건 문제가 아니다. ‘구조적 폭력’에서 비롯된 최종 결과를 백신과 분유로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기껏해야 다들 미봉책에 지나지 않을 테니, 한 마디로 건강과 보건과 의료는 무력하다!

 

이들의 질병과 죽음은 전쟁, 억압과 구속, 인권 침해, 인위적 재난 등 폭력과 부(不)자유가 몸으로 드러난 결과다. 우리는 한국 청소년, 로힝야의 난민, 북한 어린이와 산모, 데이트 폭력 피해자가 겪는 죽음과 상처에서 그 관계의 증거를 발견한다.

 

그리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다. 거창한 연구나 이론을 동원하지 않아도 생활의 상상력으로 충분하다. 물리적 폭력, 억압과 지배, 차별, 불평등이 개인과 가족과 공동체에 침입하여 삶과 신체와 정신을 망가뜨리고 병들게 하며,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한다.

 

자살과 탈수증, 영양 결핍, 손상과 같은 구체적 건강과 생명 현상을 포착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로부터 폭력의 구조와 경로로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좀처럼 보이지 않는 폭력과 부자유, 특히 구조에서 비롯된 것은 흔히 몸을 통해 제 모습과 힘을 드러내고, 비로소 만지고 알 수 있으며 분노할 수 있는 ‘물질’로 바뀌어 다시 새로운 몸을 구성한다.

 

질병과 죽음이 진입 지점이긴 하지만, 생명을 위협하는 구조를 온전히 다 드러내지는 못한다. 몸이 말해야 하면 폭력과 부자유는 극단에 이른 것이기 쉽다. 로힝야의 예에서 보듯 성인이 탈수증에 걸릴 정도면, 교육과 주거, 이동, 정치적 자유 따위를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먹고 입고 자는 삶의 기초 조건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계 곳곳에서 질병과 죽음을 통해 드러나는 폭력과 그 구조에 대해, 그로부터 위협받는 생명 현상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생명권’의 절대성을 주장하려 한다. 왜 생명권이 보장되어야 하는가는 새삼 따지지 않는다. 다시 왜 생명권을 꺼내야 할 형편이 되었는지, 그 논의도 잠시 미룬다.

 

생명권의 절대성 또는 우선성이라는 자명한 원리를 주장하는 것으로는 모자랄까? 헌법에 생명권을 명시한 국가는 독일과 일본뿐이라고 하나, 어느 나라든 생명권이 가장 앞서는 권리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우리의 관심이 생명권의 법률과 조항에 있는 것은 아니나, 현실에서 생명권을 주장하고 방어하는 것은 그 정도로 충분하리라 믿는다.

 

다만 한 가지, 새삼 생명권을 말하려니 그동안 우리가 주장했던 ‘건강권’에서 한 발 후퇴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차원이 다르고 특별한 맥락이 있다고는 하나(한국에서는 흔히 사형제도, 안락사, 낙태 등과 연관된다), 생명권이 죽고 사는 것과 관련된 것임은 틀림없다. “달성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건강”이 아니라, 죽지 않고 살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 형편이라니.

 

굳이 비교하면 분명히 생명권이 건강권에 앞선다(생명권 주장이 ‘정치적으로 유리한’ 점이다). 건강권이 확장되면 생명권에 닿는다고 생각하지만, 생명권은 인간 존재의 근본 조건 모두에 관련되는 넓고도 절대적인 권리다. 또한, 국민국가만 권리 충족의 의무를 지는 것이 아니라 국제 사회 또한 의무 주체에서 제외될 수 없다.

 

생명권은 여러 기본권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전쟁과 폭력을 막는 것, 인종이나 종교, 성별, 경제 능력 등에 따른 차별을 없애는 것, 음식과 주거, 위생 등 삶의 기본 조건을 보장하는 것, 자기를 발전시키고 스스로 미래를 결정할 수 있게 하는 것 등이 모두 생명권과 무관하지 않다.

 

생명권을 지키고 보장하며 증진하는 인간 활동은 개방적이고도 실천적이다. 무엇을 목표로 할 것인가,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누가 할 것인가, 이 질문들에 한 가지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선 생명권의 절대성과 우선성을 다시 확인하는 것부터.

 

다음으로 진보적인 생태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리처드 레빈스의 성찰에서 배우고자 한다. 다음 말에서 ‘건강’을 우리의 관심인 ‘생명’으로, 또는 그 무엇으로 바꾸어도 의미가 통한다(리처드 레빈스 지음, 신영전 외 옮김, <리처드 레빈스의 열한 번째 테제로 살아가기>, 한울 펴냄).

 

“건강은 한번 획득하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어떤 행복한 최종 상태가 아니다…. 건강한 유기체 또는 개체군이란, 새롭거나 반복되는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자원, 어려운 시기를 견뎌낼 여력, 그 자원을 필요한 곳에 동원할 수 있는 융통성, 파괴적인 영향을 가능한 한 잘 예견하고 더 최악의 사건을 최소화하는 환경을 만들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며, “건강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일은 사회와 개인의 영구적인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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