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문재인 케어, 누구의 관점으로 어떤 범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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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이 찬바람을 맞으면서 ‘문재인 케어’ 반대 집회를 열었다. 여론은 싸늘했지만, 보건복지부가 협의체를 만들자고 나설 정도면 아주 실패한 결과는 아닌 모양이다(관련 기사 바로 가기). 대통령도 의사들이 염려하는 것을 이해한다니, 오히려 성공했다고 해야 하나.

성공이면 어떻고 실패면 또 어떤가. 솔직하게 말하면, 의사들의 행동과 정부의 반응은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어디 의사뿐이겠는가, 그동안 배운 바로는 의료전문직, 아니 대부분 집단이 비슷하다. 이해관계가 걸린 일마다 집단의 힘을 보이고 의사결정권자를 압박하는 것이 표준 절차처럼 굳어졌다.

이 또한 놀랍거나 크게 문제 삼을 일은 아니라고 본다. 어떤 사회 어떤 사람이든 자기 이해를 지키려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만 있으면 힘을 키워 더 큰 가치를 차지하려는 것도 비판하기 어렵다. 모두가 ‘다양성’을 말하고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마당에, 지도층이니 직업윤리니 하는 책망은 과녁이 빗나갔다.

그게 아니라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다원성의 게임을 하겠다는 것이 문제다. 보건복지부가 의사들의 말을 듣기 위해 협의회를 한다는 것부터 그렇다. 정부는 그저 정치적 제스처라고 말할지 모르나, 집회의 압력으로 새로운 협의를 하는 것만으로 문재인 케어의 ‘민주성’은 크게 후퇴했다.

 

 

형식부터 문제다. 직접 이해관계만 생각해도 문재인 케어의 당사자는 의사에 한정되지 않는다. 다른 직종은 물론이지만, 보험료를 부담하는 가입자와 납세자, 환자와 그 가족, 또는 제3자는 어디에 있는가? 언론과 여론으로 충분하다고 보는지 모르지만, 착각이다. 흩어지고 산발적인 의견은 아무 힘이 없다. 그 기울어진 운동장이 평평해져야 최소한의 민주주의를 보장할 수 있다.

이대로 가면 앞으로가 더 큰 문제다. 미흡한 민주주의와 정치력, 강고한 관료주의가 어우러져 문재인 케어를 ‘침식’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역사적 교훈으로 보건대, 지금 추스르지 않으면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말할 것이 많으나 크게 두 가지 원칙만 다시 확인하려고 한다.

 

첫째, ‘사람 중심’의 원칙을 다시 세우고 지켜야 한다. 문재인 케어가 달성하려는 목표는 (정책 의도와 무관하게) 큰 이견이 없다고 믿는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큰 비용 걱정 없이 필수 보건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닌가?

비급여를 몽땅 없애거나 무슨 체계를 가지런하게 정리하는 것, 누구의 수입을 보장하는 것은 그 목표를 이루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OECD 평균치와 비교하여 보장성이 떨어지느니 보장률을 얼마로 올리느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동의하겠으나, 옆에서 말하는 사람이 없으면 잊기도 쉽다. 정책을 추진하는 쪽과 그 정책이 내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쪽이 모두 마찬가지다. 추상적이고 사회적인 가치가 내 생활과 이해관계보다 앞서기 어렵다. 사람 중심의 원칙을 다시 세우자는 이유다.

건강과 보건, 그리고 그 정책을 관통하는 ‘사람 중심성(people-centeredness)’은 최근의 세계적 화두이자 경향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제안한 내용을 보면 (통합적인) 사람 중심의 보건의료는 “질병이 아니라 사람과 지역사회를 보건체계의 중심에 두고, 사람들을 서비스 수혜자의 수동적 위치가 아니라 스스로 건강을 책임지는 역할을 하도록 역량을 강화하는” 것을 가리킨다(관련 링크 바로 가기).

문재인 케어에서 사람 중심의 ‘체계’를 논하는 것은 역부족이니, 먼저 “사람과 지역사회를 보건체계의 중심”에 두는 것으로 인식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그 첫째 과제는, 다른 어떤 것보다,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이 사람들의 고통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건강보험의 보장성 한 가지만 생각해도 이 필요는 다르지 않다.

정부에 묻는다. 그 흔한 여론조사라도 한번 했는가? 평범한 회사원, 늘 병원에 다니는 농촌의 독거노인, 애를 키우는 젊은 부부, 비정규 노동자, 청년 실업자, 그들은 무엇을 간절하게 원하는가? 사람 중심의 문재인 케어는 지금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고통에서 출발해야 한다.

 

둘째, 문재인 케어는 단지 ‘비급여’를 줄이고 ‘급여’를 늘리는 차원이 아니어야 한다. 당국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현실의 이해관계와 이를 둘러싼 정치는 점점 한 가지 문제로 수렴한다. 비급여의 포획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급하다.

문재인 케어는 ‘보편적 건강보장’이라는 세계적 목표와 일맥상통한다. 참고로 이 말은 영어로는 ‘universal health coverage’, 약자로는 ‘UHC’라 부른다. 굳이 영어에 약자까지 소개하는 이유는 적어도 2030년까지 세계 모든 나라가 이를 달성하도록 압력을 받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세계적인 유행(?)이라 할 정도니, 그 정신과 목표를 우리만 모른 척하기 어렵다.

짐작하겠지만, 보편적 건강보장을 위한 (공식적) 국제운동을 지휘하는 것은 세계보건기구(WHO)다. 이 국제기구는 보편적 건강보장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이 조직의 새로운 수장인 에티오피아 출신 테드로스 사무총장이 며칠 전 내놓은 메시지는 이렇다(관련 링크 바로 가기).

“보편적 건강보장은 단지 건강보험이나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차원을 넘는다. 이는 건강한 생활습관을 촉진하고 질병을 예방함으로써 건강을 보호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빈곤의 한 가지 이유를 없애는 방법이며, 건강과 보건 분야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길이기도 하다. 건강과 노동 능력을 유지하여 포용적 경제성장으로 갈 수 있으며, 성 평등에도 기여한다. 이를 통해 감염병 유행을 예방하고 조기에 발견하며 유행을 억제하는 것도 가능하다.”

단지 세계보건기구의 허황한 소리라 할 수 없다. 이에 연결하여 다시 문재인 케어의 ‘본질’을 확인하자. 보편적 건강보장은 건강증진, 예방, 치료, 재활을 망라한다. 서비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체계도 종합적이다. 의사들이 반발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단지 건강보험 급여와 수가만 어떻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보건의료체계 전반을 같이 손봐야 하는 과제다(관련 링크 바로 가기).

시스템 전체가 움직이지 않으면 문재인 케어가 목표로 하는 ‘작은’ 목표도 달성하기 힘들다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정부에 묻는다. 문재인 케어는 이 정부 전체의 건강체제와 정책, 제도의 목표와 정렬되고 통합되어 있는가?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을 수립했는가? 일차의료와 공중보건체계, 공공보건의료와는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역할을 어떻게 분담했는가?

이 두 가지 원칙은 말 그대로 원칙일 뿐, 실제 정책으로 바꾸는 데는 정치와 정치적 리더십이 작동해야 한다. 안타깝지만 지금까지는 그것이 그리 미덥지 못하고, 체계도 제대로 갖춘 것 같지 않다. 의사 시위를 계기로 심기일전, 원칙을 가다듬고 체계도 정비하기 바란다.

다시 강조하지만, 민주주의와 시민의 역량을 믿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미 존재하는 역량은 작동할 수 있도록, 잠재한 역량은 모양을 갖추고 커질 수 있도록, 민주주의의 담대한 정치적 공간(들)을 창출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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