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연구통] 지역 간 건강 불평등의 정치경제적 뿌리
이주연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원
사회적으로 건강불평등이 처음 문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 원인을 술, 담배, 건강하지 못한 식생활 등 개인의 생활습관 차이에서 찾으려 했다. 하지만 연구가 거듭될수록 건강생활습관 같은 직접적 요인들보다는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 이를테면 소득 불평등, 실업, 근로환경, 지역사회 환경 등이 중요하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그에 따라 건강에 해로운 행동을 하는 ‘개인을 탓’하기 보다는 건강한 삶을 가로막는 ‘사회를 탓’하고, 사회적 해결책을 모색하게 되었다.
오늘 소개할 연구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에 영향을 미치는 보다 근본적인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뿌리에 주목한다. 지난 달 <국제역학지>에 출판된 영국 캠브리지 대학 노스라티교수팀의 논문 (☞바로 가기 : “소득과 평균 수명의 상관관계에 관한 재고 : 탈산업화, 수감률, 건강 격차의 심화”)은 ‘탈산업화’와 ‘수감률’이 미국의 지역 간 건강 불평등을 설명하는 중요한 정치경제적 뿌리임을 보여준다. 이 연구는 2001~2014년 동안 미국 50개 주에서 제조업의 쇠락으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늘어날 때, 혹은 1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고 감옥에 투옥된 수감자의 숫자가 늘어날 때, 지역 주민의 평균 수명이 어떻게 변하는지 분석했다. 특히 이러한 효과가 저소득층(하위 25%)과 고소득층(상위 25%) 사이에 다르게 나타나는지에 주목했다.
분석 결과, 탈산업화가 심한 지역일수록 저소득층의 평균 수명이 짧았으며(그림 1), 수감률이 높은 지역에서 평균수명은 더욱 가파르게 감소했다(그림 2). 똑같은 저소득층이라고 해도, 거주 지역에 따라 평균 수명에 차이가 났다. 이를테면 수감률이 상위 10%에 해당하는 주는 인구 1000명당 수감자 수가 평균 6.95명이었고, 하위 10%에 해당하는 주는 평균 1.85명이었는데, 전자의 지역에 거주하는 저소득층 주민의 평균 수명이 1.5년 더 짧았다(그림 3).
수감률이 가장 높은 10개 주 가운데 8개 주는 미국 남북전쟁 이전에 노예 제도가 합법이었던 소위 ‘노예주(slave state)’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별 인종 구성의 차이를 고려한 후에도 탈산업화와 수감률이 저소득층의 평균 수명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지속되었다. 반면 소득 상위 10%의 평균 수명은 거주 지역의 탈산업화나 수감률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말하자면, 미국의 경제는 불평등하게 성장해왔고, 지역의 경기 불황과 형벌체계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수명만 단축시킨 셈이다.
연구진은 탈산업화로 만성적 실업에 직면한 주민들이 경제적 불안으로 스트레스가 늘어나며, 마약 중독, 흡연, 음주 등 건강하지 못한 행동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경기 불황 상황에서 정부는 사회보장을 확대하기 보다는 긴축정책을 도입하고 엄벌주의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응해 왔다. 빈곤 가정의 주된 생계부양자가 수감되면 가족이 해체되고 가족 전체가 빈곤에 빠지며, 형기를 마친 후에도 노동시장 재진입이 어려워진다. 지역의 탈산업화, 투옥 같은 징벌적 조치는 ‘사람들이 태어나고 성장하며 일하고 늙어가는 환경,’ 즉 ‘건강의 사회적 결정 요인’에 영향을 미치는 상위의 정치경제적 맥락으로 작동한다.
미국의 전통적인 ‘러스트 벨트'(자동차와 철강산업단지) 지역에서 탈산업화로 실업이 급격히 늘어나고, 수감률이 가장 높은 곳이 과거의 노예주들이라는 것은 “자연 환경이나 문화적 전통 때문이기보다 거의 전적으로 정치와 정책의 효과”라고 할 수 있다(☞관련 도서 : 한국의 건강 불평등). 제조업의 급속한 쇠퇴와 노예제의 역사적 유산은 미국 내 지역간 건강불평등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연구진은 미국사회 지역간 건강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산업정책을 개선하고 취약 지역, 취약 계층에 대한 엄벌주의적 대응을 멈춰야 한고 주장한다.
한국 사회 지역 간 건강불평등도 미국 사회와 구분되는 고유한 정치경제적 맥락을 갖는다. 군사독재 정권은 정치적 기반이었던 영남 지역에 편향된 경제개발정책을 추진했다. 영남권에는 수출주도형 경제개발 기반시설이 집중되면서 지역 경제가 성장한 반면, 호남 지역은 오늘날까지도 사회경제적 저성장의 늪에 빠져있다. 한편 1990년대 후반 이후 3차 산업으로 산업구조가 개편되면서 수도권에 정치, 경제, 문화 자원이 집중되었고, 그에 따른 수도권-비수도권의 격차는 더욱 심해졌다. 한국 사회의 지역 간 건강불평등도 이러한 정치경제적 분할선을 따라 분명하게 드러난다(☞관련도서 : 한국의 건강 불평등).
한 사회의 건강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인’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원인의 원인’을 찾아가는 길의 끝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뿌리로 이어진다. 건강 불평등을 발생시키는 보다 근본적인 정치경제적 맥락을 이해할 때, 건강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우리의 전략도 ‘개인’적이기보다는 ‘사회’적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