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평창 동계올림픽 활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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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풀논평] 평창 동계올림픽 활용법

 

평창 겨울 올림픽 행사가 시작되었다. 뒤늦게 기간을 확인해보니 무려 17일간, 2월 25일이 되어야 끝난다. 지상파 3사가 같은 중계를 매일 하고 있는 데다(이렇게 하는 것이 최선일까?), 이번 주 맞는 설날도 집어삼킬 태세다. 일상에 깊숙하게 들어와 버렸으니, 잠깐이라도 생각을 가다듬지 않을 도리가 없다.

 

올림픽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결과적으로 이번 행사에 북한이 참가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싶다. 억지로 찾아도 좋은 점은 몇 가지뿐, 대부분은 비판 거리였을 터이다. 행사를 준비하면서, 지금, 그리고 앞으로 상당 기간 올림픽은 어떤 정치적·사회적·경제적 현실의 원인이자 결과물 노릇을 해야 한다.

 

가장 먼저 상기할 것은 그 말썽 많던 환경 파괴.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그 스키장이 사실은 가리왕산의 10만 그루 나무를 베고 만들어진 것이다(기사1 바로가기 기사2 바로가기). 앞으로도 잊지 못 할 반성이자 교훈이다. 과거만 문제가 아니다. 경기 후 남는 부담을 져야 할 지역 주민의 고단함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것은 지난 일이고 또 어떤 것은 앞으로 닥칠 일이라 하자. 현장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보통 사람들에게 올림픽은 다른 종류의 현실이다. 올림픽이 예능으로 그리고 상품이 된 것은 오래, 이번 올림픽도 마찬가지다. 겨울 올림픽 종목은 생활과 거리가 더 멀어 여름 올림픽보다 예능적 요소가 더 강하다. 사실 올림픽을 그 정도로 생각하면 나쁘게 볼 필요도 심각하게 비판할 근거도 별로 없다. 여느 드라마나 영화처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관람’하고 즐기면 된다.

 

그냥 연예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관람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으니 문제다. 유·무형의 ‘비용’을 무릅쓰고 올림픽을 규정하고 가치를 매기는 데는 올림픽의 정치경제가 작동한다. 많은 나라 많은 도시가 올림픽을 유치하려고 경쟁이 치열한 것만 봐도 그렇다. 돈이 되지 않고 얻는 것이 없는데도 그럴까?

 

올림픽을 개최할 만한 동기는 충분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88년 서울올림픽이 어떤 정치경제 효과가 있었는지 생각해보라. 베이징 올림픽이나 소치 동계올림픽도 마찬가지다. 평창올림픽에 대해서는 조직위원회가 10년간 32조 원의 경제효과가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기사 바로가기).

 

엄청난 이익이 있다 치자. 문제는 그 이익을 일부가 독점하고 비용은 골고루 부담하는 것이다. 평창 올림픽에서도 누군가는 32조에 달한다는 과실을 차지하겠지만, 부담은? 지금 우리가 보고 즐기는 올림픽은 세금과 후원, 관람료, 자원봉사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삼성은 갤럭시 노트 올림픽에디션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코카콜라는 올림픽을 ‘후원’한다고 요란하지만, 결국 누가 부담하고 누가 얻는가?

 

그런 중에도 ‘보편적 이익’의 논리는 점점 더 동요하는 것이 새로운 상황 변화다. 한국에서도 그런 조짐이 있었지만(기사 바로가기), 이익과 부담의 불균형이 심해질수록 많은 도시와 그 주민이 개최를 거부할 것으로 보인다(기사 바로가가기). “이들은 올림픽 개최 비용을 교육이나 의료, 대중교통 개선에 투자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이런 균열이 생기면, 진작 돈과 상업이 된 올림픽은 살아남기 위해 점점 더 보편적 이익을 따지고 주장할 것이다. 그중 한 가지가 “올림픽은 건강에 좋다”는 논리가 아닌가 싶다. 올림픽은 생활체육을 진흥하고 사람들의 신체 활동을 늘리며, 젊은 층이 더 많은 운동을 하도록 자극한다는 것.

 

런던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영국 정부도 이런 논리를 내세웠다. 바로 ‘페스티발 효과’다. 직접 효과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올림픽이 계기가 되어 사람들이 더 많은 신체 활동을 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논평 바로가기. 2012년 <서리풀 논평>이 인용했던 2009년 보고서는 사라졌다! 인터넷으로는 어디서도 검색이 되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주장은 그야말로 기대일 뿐, 과학적 근거로 뒷받침되지 못한다(논문 바로가기). 아마도 겨울 올림픽은 그런 효과가 더 적을 것이다. 생활에 밀착된 종목이 드물고 시간과 장소를 가리는 것이 많다. 대부분이 관람 이상을 넘기 힘들면, 생활에 밀착하기는 그만큼 어렵다.

 

여기까지는 비관과 회의가 더 강했고, 예능 이상의 가치 부여에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예능 즐기기 수준에 만족했어야 할 올림픽에 변수가 생겼으니, 바로 북한이 참가한 것이다. 이로써 올림픽에는 새로운 정치적 지평이 생겼고, 기대하지 않던 가치를 바랄 수 있게 되었다.

 

다음은 완전히 바뀐 계산서와 이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이다.

 

먼저 정치성을 부인하는 태도에 대해. 순수한 스포츠 정신 운운하면서 탈정치를 빙자한 정치로 시종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나쁜 올림픽 정치다. 올림픽은 자주 개최국의 국가 이익, 정부의 정당성 방어, 지역의 이해관계에 봉사한다. 평창 동계올림픽 또한 중앙정부와 지방이 그토록 개최를 열망한 정치적, 경제적 이유가 있다.

 

넓은 의미의 정치, 예를 들어 국제, 인종, 젠더, 문화, 개발 등을 포함하면 올림픽의 정치성은 더 커진다. 넓은 의미의 정치든 좁은 의미이든, 북한이 참가하면서 평창 올림픽은 백 퍼센트 정치로 바뀌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올림픽은 본래 정치적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단발성 이벤트로 무엇을 하겠느냐는 회의에 대해. 정치적 가치에 한정하면 북한의 참가 자체보다는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 이번 기회에 한반도의 긴장이 줄고 평화체제가 구축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면 올림픽 개최의 가치는 충분하다. 심지어 돈과 경제로 쳐도 장기적으로 이익을 남길 수 있을지 모른다.

 

여러 정치가 만난 것을 피할 수 없으면, 올림픽은 이제라도 ‘좋은’ 정치에 봉사해야 한다. 지금 올림픽의 정치가 쉽게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이 도전이다. 미국은 미국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그리고 일본까지 나서서 최대한 자기 이익을 챙기려 한다. 국내에서도 사사로운 이익을 탐하는 세력이 한둘이 아니다.

 

현실이 어렵다는 비관에 대해. 상황이 복잡하고 새로운 기술을 찾기 어려울수록 원칙과 지향이 명료해야 한다. 특히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하느냐는 것, 누구를 위해 어떤 결과를 바라는 것인지가 중요하다. 북한의 핵 무장을 반대하고 한미동맹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제재는 왜 하자는 것이고 대화는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우리가 지지하는 원칙은 한 가지다.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그러려면 튼튼한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 제재와 대화, 압박과 투자는 모두 방법론과 수단일 뿐이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무엇으로 보든, 이 일을 위해 최대한 활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남은 기간, 올림픽이 좋은 정치의 촉매 노릇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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