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논평] 이대목동병원 사건이 ‘일벌백계’가 되려면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신생아 네 명이 숨진 사건이 있었으니,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고, 그 때문에 지난주 의료진 3명이 구속되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느 개인이 아니라 체계와 체제의 문제로 보려 한다. 한국의 사법체계와 체제, 정치체제와 사회체제는 의료진 개인을 구속하는 것으로 응답했다(‘체제’라는 표현에 주목해주기 바란다).
의료진 구속까지 불러온 사건이 생긴 큰 이유 한 가지는 관행 때문이다. 잘못인 줄 알면서도 늘 하던 대로, 남도 하는 일인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어쩔 수 없어서 위험을 해결하지 않았고, 결국 사달이 났다는 것이다(기사 바로가기). 오늘 말하고자 하는 체제의 한 단면이다.
관행이 중요한 원인이었던 사건에 대해 여러 당사자가 마찬가지로 관행대로 반응하고 행동하는 것은 익숙하면서도 이상하다. 그 관행이란 이런 순서다. 병원과 재단의 행동(보호자에게 설명하기 전에 기자회견부터 한 ‘표준업무절차’를 기억할 것), 질병관리본부의 원인 조사, 병원과 의료인 개인의 위법 행위 찾기, 처벌, 의료인의 반발. 이 모든 과정에는 피해자의 분노와 요구가 개입한다.
이 익숙한 절차는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 다른 비슷한 사고가 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고 이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고 자체가 비슷하게 되풀이되리라. 이 점에서도 체제가 작동한다. 어디 의료뿐이랴, 다른 분야에서도 비슷한 사고와 비슷한 대응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 문제가 된 공기업과 금융기관의 채용 비리도 체제적 문제다.
개인의 선호, 능력, 노력을 넘어 일관되고 체계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바로 체제다. 한국 보건의료체계와 사법체제가 만나고 책임과 처벌의 책임이 어우러진 것이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이 불행한 사태가 아닌가 싶다. 이 경우에 체제를 묻는 것은 곧 무슨 책임을 누가 지는지, 어떤 방식의 책임인지, 그 책임과 처벌은 어떤 동기에서 작동하는지를 다시 질문하는 것과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 한국 사회에서 책임을 묻는 방식과 결과는 국가 통치의 ‘신자유주의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그것은 국가 책임을 민간으로 넘기고(민영화) 그 책임을 최대한 분산하는(개인화) 신자유주의적 통치를 뜻한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경로, 원인 밝히기, 잘못을 찾아 책임을 지우는 것, 처벌로 이어지는 과정은 그 체제에 조응하는 법률체계라 해야 한다.
사회구성원의 생명을 보호하고 건강을 유지, 증진하는 것은 근대국가의 피할 수 없는 책임이었다. 부국강병이라는 국가 이익을 위해서든 사람들의 장수와 건강에 대한 바람에 바탕을 두든, 건강은 국가가 관심을 두고 역할을 하는 필수 영역 중 하나였다. 감염병 대처, 위생과 보건, 영양, 예방접종 등에서 볼 수 있는 국가의 역할이 바로 그런 것이다.
신생아 중환자실 사망 사건에 전통적인 국가 역할, 즉 ‘책임지는’ 국가를 호출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몹시 어렵다. 사고의 책임을 둘러싼 언론 논조와 여론을 보라. 사고의 간접 원인으로 병원의 경영 상태나 건강보험 수가를 말할 정도가 가장 멀리 간 것이다. 국가는 멀리 떨어져 있고 눈에 보이지 않으며 추상적이다. 용케 책임을 떠올린다 하더라도 법률적 책임이 아니라 도덕적 또는 정치적 책임에 머무른다.
‘체력은 국력’임을 말하던 그 국가는 어디로 왜 사라졌을까? 이성과 정서의 시야에서 국가가 사라진 것은 구성원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할 국가의 책임이 민간으로 넘어간 결과다. 민영 보건의료체제는 국가가 아니라 재단과 민간 병원과 민간 의료인이 움직인다. 건강과 생명에 대한 국가의 책임 그리고 국가 주권은 민간에 위임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철저하게 ‘민영화’되었다.
설마 싶으면, 비슷한 사고가 어딘가 공공병원에서 일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국가는 결코 같은 정도로 뒤에 숨어 있을 수 없으리라. 민간 의료가 압도적이고 체제 자체가 민영이라 옆에 있는 민간 병원도 함께 끌려 나오겠으나, 인력과 시설, 재정을 두고 부분적이나마 국가 책임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메르스 사태 때 국가에 대한 요구와 책임이 빗발친 것을 기억하면, 같은 일이 공공병원에서 생겼을 때를 상상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책임의 ‘개인화’다. 재단이나 병원 경영진이 주사제를 나눠 쓰라거나 간호사 근무 시간을 어떻게 하라고 시시콜콜 직접 결정하고 지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각 부서별 경영수지가 어떻고 적자가 어떻다는 말만 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경영 회의 때 부서별 경영성과를 나눠주고 시설 투자나 축소, 폐쇄를 거론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병원이나 마찬가질 테니 이런 통치술에 따른 결과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이제 결정하고 실천하는(또는 실천하지 않는) 주체는 각 부서의 의사, 간호사, 직원으로 나뉜다. 분산되고 개인화한 각 부서와 개인은 그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해 통치에 응답할 수밖에 없다. 그 성과와 경쟁과 책임 체제에서 개인은 자신을 통치하고 스스로 책임을 지는 행위 주체가 된다.
병원 경영진이나 재단이라고 왜 할 말이 없겠는가? 시장에서 경쟁해서 성과를 내고 살아남으려면 병원을 더 키워야 하고 암센터도 새로 지어야 한다. 새로운 첨단 장비를 빨리 들여와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다른 재단과 병원은 그렇지 않은데, 이 병원만 뒤처지면 그 누구도 아닌 경영자가 무능한 탓이다. 시장 경쟁에서 패배했다는 말 자체가 국가와 시장이 책임을 개별 재단과 기관으로 ‘개인화’하는 것을 뜻한다.
지금의 법체제가 신자유주의 통치의 민영화와 개인화를 뒷받침하는 것이면, 국가 통치는 국가의 도덕적, 정치적 책임이 아니라 민간과 개인의 법적 책임을 앞세운다. 그 법적 책임은 다시 법의 토대인 신자유주의 체제를 공고하게 하는 데 이바지한다.
예를 들어 보건의료체제는 경제적 인센티브, 성과 평가와 보상, 효율성, 경쟁의 체계로 더 기울어질 공산이 크다. 수가를 인상하고 신생아 중환자실의 질을 엄격하게 감시하겠다는 방침은 시장 원리를 벗어나 공공성을 강화하는 쪽이 아니라 오히려 시장 원리를 강화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체계의 질 관리 원리는 당연히 민영화, 개인화를 기초로 하며 여기에 ‘처벌’을 보탠다. 경쟁을 통해 개별 주체의 책임을 묻고 동기를 만드는 방법의 하나로 위반을 다양한 형태로 처벌한다. 경제적 제재가 처벌의 한 가지 형태임은 물론이고 인센티브조차 처벌의 다른 모습이다. 개별 병원과 의료인은 이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도 더 효율적으로 자신을 경영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의 관심은 이런 체제를 온존한 채 사람들의 생명과 건강을 더 잘 보호할 수 있을까 하는 것으로 옮겨간다. 대답은 한 마디로 비관적이다. 수가를 올려주는 대신 평가와 감시를 강화하면 신생아 중환자실은 질이 높아지고 더 안전해질까? 중증외상센터의 전례를 보건대, 확신할 수 없다. 근본 체제가 바뀌지 않는 한, 신자유주의 시장에 처한 개인과 구조의 한계가 여러 모습으로 위험을 드러낼 것이다.
현재 체제를 그냥 두고는 수가 인상이나 정부의 공적 지원, 질 기준 강화와 질 향상, 질 감시 이외에 뚜렷한 답을 찾기 어렵지만, 그것이 근본 해결책이 되기 어렵다는 것도 분명하다. 중증외상센터 문제가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이유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시장은 꼭 처벌을 피할 수 있을 만큼만 반응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멀고 힘든 길이지만, 다시 체제의 ‘공공화’를 주장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통치가 작동하는 보건의료체제가 아닌, 공공성을 중심으로 새로운 공공보건의료체제를 꾸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