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로세토 효과와 건강한 지역 만들기

1,884회 조회됨

 
    
1961년 미국의 내과 의사였던 울프 박사는 펜실바니아주 북부 로세토(Roseto)에 여름용 농장을 하나 마련했다. 며칠 후 그 지역에 사는 의사 한 사람과 술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는데, 우연히 재미있는 이야기 한 가지를 들었다.  
 
바로 이웃한 옆 동네보다 로세토에서 심장병이 훨씬 덜 생기는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그 당시 대학병원에 근무하던 연구자였던 울프는 바로 두 지역의 사망자료를 구해서 분석을 시작했다.   
 
7년간의 사망통계를 내 본 결과 그 지역 의사의 짐작대로 두 지역은 확연하게 달랐다. 바로 옆의 지역은 미국 평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탈리아 이주민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가난한 동네인 로세토의 결과는 놀라웠다. 
 
심장병 위험도가 높은 연령대인 55세에서 64세 사이에 로세토 사람들이 심장병으로 사망한 비율이 영(0)에 가까웠던 것. 65세가 넘는 노인들의 심장병 사망률은 전국 평균의 절반도 되지 않았고, 전체 사망률 역시 3분의 1쯤 낮았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심장병 ‘청정지역’에 전국적 관심이 집중되었던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심층조사를 통해 원인이 밝혀지자 전문가들은 물론 일반 사람들의 놀라움도 더 커졌다. 
 
로세토 사람들의 건강 습관이나 조건은 의학 지식을 뒤집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매일 소시지나 미트볼 같은 기름진 음식을 먹었고 술도 엄청나게 마셨다. 지나친 흡연에 매우 열악한 노동조건까지, 심장에 좋지 않은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연구진을 고민에 빠트렸던 수수께끼의 실마리는 ‘공동체’에서 풀렸다. 찾아낸 원인은 의학의 범위를 넘는 사회 그 자체였고, 상호 존중과 협동을 기초로 하는 공동체가 사람들을 건강하게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로세토 효과(Roseto Effect)’다. 덕분에 미국에서는 공동체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되었고, 사회적 연결망(네트워크)과 사회적 지지, 그리고 사회 자본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국제학술지에 소개된 로세토 효과>
 
사회적 연결망과 응집력 그리고 사회자본이 건강을 설명한다면, 지역의 효과는 건강에만 나타날 리 없다. 사람들의 생활은 지역사회를 매개로 통합된,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로세토 효과는 건강에만 그치지 않았다. 연구가 진행되던 시기에 이 지역의 범죄율은 ‘0’이었고, 공공 부조를 신청한 사람도 전무했다(1996년 10월 11일, 시카고 트리뷴 기사). 
 
대학 진학률은 경제수준이 비슷한 다른 지역은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이런 결과가 가리키는 것은 명확하다. 로세토 효과가 건강뿐 아니라 삶의 여러 영역에 걸친 통합적 효과라는 것이다. 
         
지역에서 나타난 그 이후의 변화도 흥미롭다. 유명세도 잠간, 시간이 지나면서 로세토 효과는 점차 사라졌다. 효과를 채 밝히기도 전인 1960년대 중반부터 이미 심장병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1980년대 중반이 되면 옆 동네 수준에 가까워지게 된다. 
 
이제, 효과가 사라진 이유가 다시 주목을 받았다. 로세토에서 전통적 생활방식이 쇠퇴하고 미국의 주류 사회에 가까워진 것, 즉 ‘미국화’가 주범으로 지목된다. 
 
물질적으로는 훨씬 더 잘 살게 되었지만, 지역과 공동체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로세토 효과가 사라지면서 역설적으로 로세토 효과의 의미, 즉 지역사회가 중요하다는 것이 다시 드러났다. 
 
로세토는 역사로 남았지만, 그것으로 의미조차 끝난 것은 아니다.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터전으로서 지역의 중요성은 지금도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사회를 뒤흔든 성범죄도 지역과 무관하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대응 방법을 두고 논란이 거세다. 백가쟁명식의 대책 중에는 범죄 상업주의 또는 포퓰리즘에 기댄 것도 많다. 그러나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시대착오적인 대책으로는 효과를 보기 어렵다.  
 
물론, 딱 한 가지 방법으로 성범죄를 줄이거나 예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벤트나 엄벌만으로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은 더욱 명확하다. 효과는 더디 나타나지만, 좀 더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여기서 근본이 뜻하는 것은 일시적 조치가 아니라 사회체계와 생활에 통합된 삶의 양식을 말한다. 간단하게 표현하면 성범죄가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을 바꾸는 것을 가리킨다. ‘건강한 지역 만들기’는 근본적 환경인 삶의 터전을 새롭게 하자는 것이다.  
 
최근 벌어진 많은 성범죄는 지역사회와 무관하지 않다. 피해자, 가해자 모두 저소득층에 집중되고, ‘나홀로’ 어린이가 목표가 된 경우가 많다. 익명성의 뒤에서 드러나지 않은 채 방치된 질병도 중요한 문제이다. 
 
대체로 지역사회는 무관심했고, 사회적 네트워크는 느슨했다. 사건 전후로 사회적 지지망과 돌봄 체계가 건전하게 작동하는지도 의심스럽다.   
 
물론 사건 지역에만 해당하는 현상은 아니다. 원인이 무엇이든, 로세트 효과가 실현될 조건과는 반대인 곳이 태반이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오늘의 현실임을 부인할 수 없다.   
 
건강한 지역은 단지 순찰을 자주 돌고 폐쇄회로 TV가 많은 곳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우범지역을 없애고 자율방법을 열심히 하는 것이 핵심이 될 수도 없다. 범죄가 없었던 건강한 로세토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분명하다. 
 
서로 존중하고 협동하는 것을 기초로, 사회적 연결망과 지지체계가 갖추어진 지역이 건강하다. 이런 지역일수록 불평등과 차별이 적고 낙오자가 드문 것은 당연하다. 사람들이 공동체와 지역사회에 소속된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갖는 것은 선순환의 결과이다. 
 
건강한 지역사회가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는 로세토 효과에서 이미 보았다. 그 결과는 더 적은 범죄 더 안전한 삶터로 이어진다. 건강한 지역은 전세계적으로도 범죄를 줄이는 핵심 방법의 하나로 꼽힌다.    
 
건강한 지역이 범죄를 넘어 종합 대책이라는 것도 중요하다. 그 사회는 신체와 정신이 더 건강하고 더 유대감이 강하며 교육에 더 적극적인 공동체가 될 가능성이 높다.
 
건강이라는 시각에 한정해서 보더라도 지역 만들기는 중요한 전략이자 방법이다. 점점 더 만성질환이 많아지고 노인인구가 증가하는 환경이니 이런 필요는 더하다. 식사와 운동, 흡연, 음주, 스트레스를 지역과 떼어 놓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기능의 장애와 돌봄의 공간도 마찬가지다. 극도로 상업화된 의료의 대안도 찾아봐야 한다. 지역사회는 문제가 만들어지는 동시에 해결되는 중심터가 될 수밖에 없다.
 
건강한 지역 만들기를 원론에서 동의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만들까 하는 것은 과제로 남는다. 지향은 아직 추상적이고 전략과 방법은 명료하지 않다. 가능성도 미지수다.   
 
적어도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 새로운 전망으로 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이 땅에 지역사회가 과연 존재하며 현재도 의미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급속하게 도시화가 진행된 지난 50년의 역사, 그리고 익숙한 현재의 도시적 생활양식으로 볼 때 충분히 있을 법한 의문이다. 그러나 지역사회를 과거의 개념에만 붙들어 둘 필요는 없다.      
                       
사람이 사회적 존재인 한, 어떤 형태로든 지역사회를 만들고 발전시켜 나가기 마련이다. 사이버 공동체든 성미산 식이든 새로운 지역사회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더구나 전통적 의미의 지역사회조차 일방적으로 위축의 길을 갈 것 같지는 않다.      
     
산업화 이후 전통적 지역사회를 붕괴시킨 일차적 이유는 대규모 인구이동이었다. 그러나 산업과 경제가 상대적으로 안정화됨에 따라 인구이동 역시 좀 더 안정적인 경향을 보일 가능성이 커졌다.  
 
최근 20년간 인구이동률은 1999년 20.0%를 최고치로 꾸준히 감소하여 2011년에는 16.2%를 기록했다. 또, 2010년 현재 가구별 평균 거주기간은 7.9년으로 2005년보다 0.2년 늘었다. 느리기는 하지만 지역사회의 안정성은 좀 더 커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두 번째 도전은 로세토와 같은 지향과 가치가 바람직한가 하는 의문이다. 물론, 그것을 무엇으로 해석하든 그리고 가치가 있든 없든, 완전히 과거로 회귀할 위험은 아주 작다.
 
그보다는 전에 없던 새로운 긴장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지역사회는 국가, 시장, 공공성(시민권력), 개인과 새롭고도 다양한 긴장관계를 만들어낼 것이다. 꼭 맞는 예는 아니지만, 그런 점에서 몬드라곤 협동조합(특히 그 한계)은 적절한 교훈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지역 공동체의 기초에는 새로운 현실에 걸맞은 가치가 자리를 잡아야 한다. 아마도 개방성과 사회적 연대, 민주적 참여와 공공성, 다양성과 자율 등이 핵심 가치가 될 것이다.        
 
우리는 건강한 지역 만들기가 이 시기 중요한 정치사회적 실천과제라고 믿는다. 한국 사회에서 이는 어찌 보면 오랜 경험이자 유산이지만, 새로운 도전이자 모색이기도 하다. 협동하여 서로 노력을 보태는 한편, 새로운 실험을 통해 가능성의 공간을 열 수 있기를 바란다.       
 
(끝)

시민건강연구소 정기 후원을 하기 어려운 분들도 소액 결제로 일시 후원이 가능합니다.

추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