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쿵저러쿵해도 ‘문재인 케어’의 목표와 가치는 분명하다. 국민건강보험을 시작한 지 40년, 모든 국민을 포함한 지 30년이 지났지만, 큰 병이 들면 만만치 않은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엄중한 현실이 출발점이다. 어디 큰 병만 그런가, 별 준비 없이 병원에 갔다가 무슨 검사비라면서 몇 십만 원을 내는 일도 흔하다. 이런 지출이 아무 부담이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문재인 케어를 표방하면서 한껏 잡은 목표가 건강보험 보장률 70% 달성일 정도다. 한두 번 겪는 큰 지출(예를 들어 이른바 ‘재난적 의료비’)만 생각하기 쉬우나 상당한 비용을 계속 부담하는 쪽이 더 어려울 수도 있다. 장기요양보험 혜택을 받으면서도 매달 백만 원 가까운 돈을 부담하는 가계를 생각해보라.
다시 이런 출발선에 서면, 정부가 이미 발표한 목표라도 이루는 것이 소중하다. 건강보험 대상 항목을 넓히고 본인부담 방식을 잘 조정하면 70%라는 총괄 목표 이상의 실제 효과를 거두리라 믿는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 한다.
문재인 정부 집권 내내 계속될 사업이니 아직 성패를 따지기는 이르다. 일부 직종의 반대와 저항이 계속되니 아무 문제가 없다 할 처지가 아니다. 재정 소요가 늘어날 텐데, 경제 사정에 따라 건강보험 재정을 낙관할 수 없는 것도 중요한 장애물이다. 일차의료와 의료전달체계, 공공의료 강화 등 병행해야 할 정책에 소홀해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이 나타날 가능성도 크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문제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정책 측면에서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과제라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지피지기’인 정책은 앞으로 나가는 데 어려움이 덜한 법이다. 타협하거나 궤도를 바꾸는 데도 비용이 덜 든다.
막상 중요한 위협은 (예기치 않게) 이제 막 시작되었다. 다름 아닌, 정부가 보건의료에 대한 정책 기조를 바꾸어 영리 의료 또는 의료 영리화를 허용하거나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려는 태세가 위험 수위를 넘었다는 것이다.
의료기기 규제완화에서 시작해 바이오 의약품, 제주도 영리병원, 규제프리존, 원격의료 등이 속속 부활(!)하는 중이인 사태를 가리킨다. 정말 시작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어서 의료 서비스의 영리화, 예를 들어 영리 병원 허용과 같은 카드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이다(처음에는 일부 ‘한정된’ 범위라고 하면서).
물론, 대통령과 정부는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부인하리라. 아니나 다를까 ‘진의’가 잘못 전달되었다면서 다시 설명하는 서글픈 풍경이 익숙하다. “원격의료가 시작되면 의료 영리화로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는데 그런 우려에 해당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원격의료의 필요성을 문 대통령이 말씀하신 것”이라는 주장의 허무함이란(관련 기사 바로 가기).
일부러 허위로 말하지는 않았으리라 믿지만, 모르고 그리했다고 해서 책임을 모면할 수는 없다. 정부가 최근 발표한 보건과 의료정책들이 영리화와 무관하지 않은 것은 일차적으로는 그 배경과 맥락 때문이다. 합리적 의심 수준을 넘어 논증 가능한 추론으로 영리화 기조로 들어섰다는 것을 확신한다. ‘착한’ 원격의료나 범위를 한정하는 ‘부분적’ 영리화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맥락이란, 이들 정책이 하나 같이 경제 또는 산업정책에 포함되어 등장했다는 점이다. 혁신성장이 어떻고 규제개혁을 어찌한다면서 나온 것이 의료기기고 원격의료이며 복제약의 약값이 아닌가. 태생이 이런데, 성장동력과 일자리 그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건강과 보건과 의료는 혹처럼 붙어 다니는 구차한 설명일 뿐이다. 복제약의 약값이 국민의 비용 부담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들어본 적이 있는가? 원격의료가 취약지 주민들의 접근성을 향상하기 위한 대책이라 강변하지만, 농촌과 섬 지역의 보건의료 여건 개선을 위한 종합 대책은 거론한 적도 없다.
건강이나 의료와 관련된 것은 산업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의료기기, 복제약, 바이오, 원격의료,…규모가 크든 작든, 일자리가 얼마나 더 생기든, 이 모든 것이 산업이 될 수 있다. 때로, 필요하고 가능하다면, 산업과 경제 논리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경제와 산업이면 영리 추구는 필연적이다. 예를 들어 약품을 생각해보라. 어디서 누구로부터 돈을 버는지도 명확하다. 의료기기, 복제약, 바이오, 원격의료 모두 (최종적으로는) 사람들과 환자들이 사서 쓰는 것, 즉 소비가 수입과 이윤의 원천이 될 수밖에 없다. 장비와 기계는 병원이 사겠지만, 결국 환자와 사용자가 그 값을 치러야 한다.
보건의료가 다른 재화나 서비스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 하나는 소비자, 즉 비용을 부담하는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질병 치료에 필수적이라서, 의사와 병원이 처방해서, 어느 쪽이든 사고 쓰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은 암 환자들이 인공지능 진단기술인 ‘왓슨’을 소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런 의미에서 시장은 늘 실패한다.
현실적으로는 보건의료의 새로운 기술과 제품에 들어가는 큰 비용을 건강보험이 맡는 점도 중요하다. 기계나 장비와 같이 가격이 비쌀수록 의존도가 더하다. 보험료가 건강보험의 핵심 수입원이므로 결국 국민과 환자들이 부담하는 셈이지만, 비용 부담과 배분은 건강보험의 ‘장’에서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시장과 건강보험이 만나 문재인 케어의 조건을 규정한다. 규제완화든 무엇이든 의료기기, 복제약, 바이오, 원격의료를 확대·발전시키자는 소리는 결국 이들을 더 많이 사고 더 많이 사용하자는 뜻이다. 더 많은 상품과 더 많은 소비를 목적으로 하는 한, 단언컨대 영리 의료를 피할 방법은 없다. 이에 대한 지출과 재정 부담은 당연히 건강보험으로 몰린다.
이제 영리화는 한정된 건강보험 재정을 두고 문재인 케어와 경쟁해야 한다. 좀 더 정확하게는 문재인 케어가 영리 의료의 압력을 견뎌야 할 것이다. 비급여를 급여로 전환하고 본인부담을 낮추는 것이 급한데, 더 쉽게 그리고 더 비싸게 시장에 진입하는 의료기기, 복제약, 바이오, 원격의료가 제 몫을 요구하면?
이것만 해도 문재인 케어의 앞날을 장담할 수 없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기기나 약품, 바이오는 일단 영리화의 사이클에 들어서면 자기 확장을 계속하고 점점 더 큰 몫을 요구한다. 보건의료 서비스 제공과 이용은 더욱 기술에 의존하고, 이는 다시 새로운 기술에 대한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본질에 무관하게 ‘새로움’이 유일한 가치 척도가 되고, 드디어 무한한 상품화와 영리화, 자본 축적의 논리가 관철된다.
다시 말하지만, 새로운 기술과 약품, 바이오에 무작정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건강을 좋게 하고 고통을 줄일 수 있으면 백번이라도 이런 사태를 감내할 수 있다. 보험료를 내고 건강보험을 운영하는 본래 취지가 무엇인가? 심지어 보험료를 더 내더라도, 더 좋은 결과를 볼 수 있으면 그리 못할 것이 무언가?
문제는 지금 진행되는 영리화가 건강 효과와 가치를 보장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무엇을 위한 원격의료 확대인가를 물으면 건강에 대한 답은 늘 궁색하다. ‘영리화에 해당하지 않는 범위’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여러 버전의 원격의료가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이미 결론이 난 상태다. 멀리서 혼자 사는 노인이나 섬마을의 응급환자를 염두에 두는 것이면, 원격의료가 아니라 공공보건의료와 보건의료 시스템의 기초를 확충하는 데 투자해야 한다.
정책이 아니라 정책을 둘러싼 정치경제가 중요하게 작동하는 것이 틀림없다. 원격의료와 더불어 의료 영리화(백보를 양보해 그런 의심을 받는) 정책을 고집하는 이유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구체적인 해석은 딱 2년 전 날짜, 과거 정부 때 나온 글을 옮기는 것으로 대신한다(관련 기사 바로 가기).
“환자의 이익이라 해도 그렇고, 성장과 영리가 목표라 해도 마찬가지다. 정말 환자가 걱정이면 주치의 제도와 왕진이 더 빠르고 확실하다 하지 않는가. 원격의료만으로는, 더구나 지금 식으로는 어느 쪽도 이루기 어려운데 왜 강박적으로 집착할까.
궁리 끝에도 한 가지 이유밖에 떠올리지 못했다. 바로 정책목표의 물신화, 그리고 물신숭배. 대통령과 행정부 모두 원격의료의 혜택과 가치에는 더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법을 바꾸고 정책을 시작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 남았다. 정책의 의미와 효과는 소외되고, 껍데기 목표만 절대 가치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원격의료 이야기지만 의료 영리화로 바꾸어도 그대로 뜻이 통한다. 내친김에 혁신성장이나 규제개혁이라 바꾸어도 어색하지 않다. 그러고 보니 위기는 문재인 케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 듯싶다. 그야말로 ‘적폐’라 할 만한 완고한 사회경제적 권력관계가, 새롭지만 한편으로는 익숙한 위기를 재현하며 재생산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