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인권과 건강권, 그리고 참여할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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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0일은 세계인권선언일이다. 한국에서는 이 말이 익숙하지만, 많은 나라에서는 흔히 ‘인권의 날’로 부른다. 바로 1948년 12월 10일, 유엔총회가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한 것을 기념한다.  
 
기념일이라고는 하지만 올해 분위기는 더 썰렁하다. 가끔 형식적으로나마 하던 것들도 찾기 어렵다. 아무래도 때가 때인 모양이다. 
 
그러나 올 인권의 날 주제는 코앞에 닥친 정치행사와도 여러 모로 겹친다. 유엔이 정한 올해 인권의 날 주제가 바로 ‘참여할 권리’이기 때문이다(바로가기). 
 
유엔의 공식 홈 페이지를 보자. 참여의 권리란 공적 영역과 정치적 결정에서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특히 여성, 청년, 소수자, 장애인, 원주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차별받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유엔은 이 주제가 세계인권선언에 기초를 둔 것이라고 밝혀 놓았다. 선언의 19, 20, 21조가 이에 해당한다. 의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평화로운 집회와 결사의 자유, 그리고 정부와 정치에 참여할 권리. 
 
<유엔의 2012년 인권선언의 날 기념 누리집>
 
 
 
한국에서 참여할 권리는 어느새 가장 좁은 의미, 정치적으로는 투표할 권리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물론 그 알량한 투표권마저 허술하기 짝이 없다. 투표시간 연장은 변죽만 울리다 쑥 들어갔다. 
 
이번 선거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노동과 생계 때문에 기본적인 권리도 누리지 못할 것이다. 투표율이나 비용 문제를 따지느라 정작 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도 없었다. 
 
그러니 투표 이상의 참여는 언감생심 꿈꾸기도 어렵다. 말을 꺼내더라도 어떻게 참여할 수 있고 권리를 확대할 수 있는지 상상력은 빈약하다. 인권 차원의 참여는 그만큼 갈 길이 멀다는 뜻이리라.    
   
정치적 참여는 사정이 좀 낫다고 할까. 그나마 선거나 투표, 여론조사 같은 것들로 기본은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건강에서 참여는 형편이 훨씬 나쁘다. 뜬금없이 웬 참여 타령? 도무지 참여해야 할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건강은 병 치료를 잘 하는 것이고, 그건 의사나 병원이 할 일이지 보통 사람이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런 생각은 틀렸다. 삶의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건강도 사회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다. 안전 조치가 잘 되어 있으면 교통사고로 덜 죽고, 발암 물질을 덜 먹으면 암도 덜 걸린다. 따라서 교통안전정책, 식품정책이 건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병 치료도 마찬가지다. 건강보험과 의료급여를 잘 만들면 가난해도 비용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는 일을 없앨 수 있다. 노인보건제도를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노후의 삶과 죽음이 달라진다. 
 
내내 한국 사회를 고민하게 만드는 자살은 더 직접적이다. 미국의 정신의학자 제임스 길리건이 쓴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는 ? 미국 이야기긴 하지만 ? 자살률이 정치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프레시안 기사 바로가기).   
 
어떤 사회적 환경, 정책, 제도인가에 따라 그리고 정치에 따라 건강이 달라진다면 참여가 중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 참여는 사람을 건강하게 한다. 
 
그러나 참여가 건강을 좋게 하는 데에 별 소용이 없더라도, 참여는 그 자체로 중요하다. 스스로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참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삶’의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참여는 제도적이고 거시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아주 작게는 환자 입장에서 치료방침을 정하는 데에도 중요하다. 거시적 참여뿐 아니라 ‘미시적’ 참여 역시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다들 아는 대로, 환자와 전문 의료인이 같이 의논하고 방침을 정하는 것이 치료 결과와 만족도를 좋게 한다. 의료와 같이 지식과 정보의 차이가 크게 나는 전문 영역에서도 참여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참여할 권리를 강조했지만, 모든 이에게 평등하지 못한 참여는 더욱 큰 문제이다. 다시 말하지만,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갖는 의미 때문이다. 
 
유엔이 강조하는 참여의 불평등은 건강 영역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 분야에서는 전문성이 강하고 정보와 지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른 영역보다 불평등의 가능성이 훨씬 높을 수밖에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중의 불평등’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상식적으로 봐도 유엔이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건강이 더 나쁘다. 물론 건강 불평등은 학술적으로도 증명되어 있다. 
 
이들은 건강과 관련이 있는 의사결정, 정책결정에 참여해야 할 필요성이 더 크다. 이들의 문제가 우선 그리고 더 많이 다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참여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은 훨씬 더 불리하다. 
 
게다가 보건의료는 전문성 때문에 참여의 불평등이 더 강화된다. 정보도 지식도, 나아가 자신감도 부족하기 마련이다. 필요성은 강한데 가능성은 떨어지는 참여의 역설, ‘이중의 불평등’이 이들의 조건을 압축해서 표현한다. 
 
사실, 건강에서 참여의 권리는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 근본적으로는 건강권 자체가 허약함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한국 사회의 신세다. 매번 말과 글의 머리를 장식하지만 선언적 차원을 넘는 일은 거의 없다. 하물며, 보태서 참여의 권리까지 기대하기란. 
 
지난 11월 23일 건강세상 네트워크와 동자동사랑방은 서울시 동자동 쪽방 주민들의 건강권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건강권이라 할 수 있는 질문, 예를 들어 ‘정부가 보건의료 제공을 책임져야 한다’는 질문에는 80.7%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나 참여의 권리를 인식하는 정도는 매우 낮다. ‘의사한테 이해될 때까지 설명해 달라고 요구한다’라는 설문에는 42.1%가, 그리고 ‘정부는 나 같은 사람들의 의견에는 관심이 없다’에는 78.6%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환자로서 진료과정에 참여하는 것, 그리고 정책결정 수준에 참여하는 것까지 생각하기는 참 어렵다.    
 
참여할 권리도 넓은 의미의 건강권에 포함되어야 한다. 권리는 어떤 상태나 수준을 뜻할 뿐 아니라, 거기에 이르는 과정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건강에 대한 권리, 보건의료에 대한 권리는 단순히 여기에 ‘접근’하고 ‘이용’하는 개인의 권리나 자유를 넘어선다. 
 
이미 존재하는 사회와 체제가 규정해 놓은 것에 따라 자원을 배분하고, 배분된 자원이 권리를 충족하는가를 따지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의 말을 빌리자면, 배분과 접근을 규정하는 틀 그 자체를 “우리의 가슴이 바라는 것을 좇아” 바꿀 권리가 있다. 
 
건강권(건강할 권리)이 이 시대 가장 보편적인 인권의 하나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어디까지 권리인가, 또는 국가의 책임이 어디까지인가를 두고 말이 많지만, 핵심적인 인권이라는 것은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다.  
 
우리는 건강권이 단지 건강이나 보건의료에 접근할 권리를 넘어 건강과 관계된 여러 과정에 참여할 권리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본다. 좁게는 환자의 권리부터 넓게는 정치적 권리까지, 참여는 제외할 수 없는 건강권의 핵심 요소이다. 
 
선거는 참여의 권리를 나타내는 대표적 행동이지만 또한 최저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더 많은 참여를 위한 선거의 역할을 부인하지 않지만, 더 많고 더 좋은 참여로 이어지지 않으면 신기루를 좇는 것 이상이 되기 어렵다.    
  
현재로서는 이번 선거가 참여의 권리를 확대하고 진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참여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건강권은 더욱 더 그렇다. 
 
이번 선거의 결과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인권과 건강권을 확대시키고 고양시키는 조건으로 작용할 수 있을 때만 그렇다. 결과가 어느 쪽이든, 선거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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