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코 현실이 되어버린 예상. 정부가 전국 곳곳에 이른바 ‘예비타당성 조사(예타)’를 면제하는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한다(기사 바로가기기). 경제가 어렵다, 경기가 다 죽었다, 사업이 다 망했다는 소리가 마치 유일한 진실인양 떠돌 때, 지지율에 초조한 정권이 내놓을 수 있는 카드가 이것뿐인 모양이다. 건설과 토목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니, 무엇보다 그 무능력이 답답하고 또한 두렵다.
철학과 지향이 국가권력과 정부의 무력함을 웅변한다. 일부에서는 새로 바뀐 경제팀이 무슨 역할을 한 것으로 말하지만, 우리는 이 정부가 경제 기조를 과거형으로 되돌린 결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한국 경제에 대한 새로운 구상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으나, 있었다 하더라도 이제 ‘국정 기조’는 완전히 바뀌었다. 과거로 복귀했다. 아니 ‘정상화’인가?
경기 부양이나 경제의 외형이 아니라 지역균형 발전을 위한 것이라 강변하지만, 면제 대상 사업을 표시한 지도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몇 개만 빼면 모두 철도와 도로, 공항 사업인데, 무슨 수로 갑자기 그 지역이 발전한단 말인가?
새만금국제공항, 세종-청주 고속도로, 서남해안 관광도로, 동해선 단선 전철화, 제2경춘 고속도로, 남부 내륙철도, 부산 신항-김해 고속도로,…정부는 이런 사업이 정말 지역균형 발전을 촉진할 것이라고 보는가? 지역 주민이 좀 더 편리해질지는 모르겠지만, 건설과 토목에 의존한 일시적 경기 부양을 빼고는 무엇을 얻으려는지 알기 어렵다.
우리는 예비타당성 조사의 타당성이나 그것을 면제하는 논리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지난 정권의 4대강 사업에서 보듯, 아라뱃길의 운명이 증명하듯(기사 바로가기기), 타당성 조사니 비용편익분석이니 하는 것은 정치적 결정을 치장하도록 흔히 남용, 오용, 악용된다. 기껏해야 책임 떠넘기기에 쓰이는 관료적 제어 장치라고나 할까.
예비타당성 조사라는 ‘도구’보다는 국가 재정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그 지향과 기조가 더 중요하다. 지금 토목과 건설사업의 성격이 어떻고 국내총생산 대비 비중이 어떻다는 소리를 다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모두가 목을 매는 것, 일자리를 늘릴 것이라는 기대도 다 허망하다(기사 바로가기). 한마디로, 시대착오적이다.
토건 공화국이라는 비판에 대해 정부는 이미 ‘생활 SOC’가 있지 않으냐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올해 예산만 8조 6천억 원을 배정해 이미 추진 중인 사업, 이번과 같은 대규모 SOC에 비하면 그나마 좀 나은 면이 있다(기사 바로가기). 하지만, 생활 SOC조차 적어도 현재까지는 ‘미니 토건사업’이 태반이니, 따지고 보면 오십보백보다.
“정부는 우선 국ㆍ공유지를 활용한 생활SOC 투자를 늘리기로 했다. 주민센터와 선거관리위원회 등 도심 노후청사 재개발사업에 체육시설과 도서관, 주차장 등 다양한 생활SOC 시설을 추가하는 방식이다. 사업계획 준비 단계인 옛 부산남부경찰서와 충남지방경찰청, 천안지원ㆍ지청 등 3곳의 복합개발사업계획에 생활 SOC 시설을 추가 반영하도록 했다.” (기사 바로가기)
“시는 이번 보고회를 통해 지역 밀착형 생활SOC 사업 중 △ 여가•건강활동 분야 ‘산업단지 내 특화 작은 도서관 조성사업’ 등 32건 △ 지역일자리•활력제고 분야 ‘중소기업 근로자 복지시설 개선 지원사업’ 등 15건 △ 환경•생활안전분야 ‘노후재활용 선별시설 현대화사업’ 등 29건 등 총 76건 총사업비 5907억원 규모의 사업을 발굴했다.” (기사 바로가기)
새로운 접근과 사업을 말하지만, 여기서도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아직 시설, 시설, 시설이다. 건물과 시설을 짓고 고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업(프로그램)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로서는 대규모 토건 사업에 대한 예타 면제와 생활 SOC는 서로 보완적이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보완이 아니라, 경기와 경제 측면의 기존 질서를 수호하려는 상호 보완책. 그것조차 기업과 기득권 중심이다. 한 보수 성향 인터넷 매체의 보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형건설 A사 관계자는 “주택 경기 둔화, 해외수주 불확실성 증대 등으로 업계 분위기가 좋지 않았는데, 이어지는 SOC투자 소식으로 분위기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며 “대규모 예타 면제 프로젝트는 대형사에게, 생활 SOC에는 중견 또는 지역 업체에게 단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기사 바로가기)
지금이라도 물어야 할 질문은 누구에게 무슨 도움이 되고 누가 어떤 효과를 누리는지, ‘사람 중심’의 국가 재정 투입인지? 하는 것이다. 토목과 건설로 경제와 경기를 떠받치면, 그 ‘효과’는 누구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가?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나아지는가? 지역의 정치인은 그렇다 치고, 새만금 국제공항과 남부 내륙철도로 지역 주민은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대안과 답을 말한다. 토건 공화국의 대안으로, 건설과 토목 중심의 경기와 일자리 대책에 대해, 이미 상당한 사회적 합의와 공감대가 마련되어 있다. 그중 하나가 사회적 인프라 확충, 더 좁히면 보건복지 SOC를 꼽아야 한다((참여연대 논평 바로가기).
지금 정말 투자가 필요한 ‘사회적 기반’은 무엇인가? 을씨년스러운 빈 공항, 차도 없는 고속(화) 도로, 또는 덩그런 문화회관이 중요한가, 아니면 공공임대주택, 국공립유치원, 공공병원과 공공요양시설, 커뮤니티케어가 더 중요한가? 주민센터 건물 개축이 급한가, 돌봄 인력 확충과 처우 개선이 더 시급한가?
사람을 중심에 놓으면, 현실의 고통과 요구를 생각하면, 길게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보건복지 SOC가 훨씬 더 급하고 중요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SOC를 오로지 시설, 건물, 토목과 건설로 보는 시각을 벗어나야 한다. 보건복지에는, 아니 앞으로 지역민의 삶에는, 시설도 시설이지만 인력과 사업과 시스템이 핵심 SOC다. 본래 말뜻인 ‘사회간접자본’으로 바꾸어도 마찬가지다.
순전히 국가 재정 측면에서, 인력과 프로그램을 확대하면 계속 재정 수요가 생긴다고 걱정하는지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한 번 돈을 들이고는 그만인 시설이 많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새만금 국제공항과 남부 내륙철도가 과연 그럴까?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겠지만, 두고두고 국가 재정을 투입해야 할 것이다.
정부와 공무원이 이런 사정을 모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예비타당성 조사의 역할이 바로 그런 것인데, 국가 재정의 미래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 왜 보건복지보다 주민의 삶의 질보다, 공항과 철도, 도로와 건물에 돈을 쓰겠다고 하는가?
‘경제권력’의 불균형이 주범이다. 예타 면제 사업과 생활 SOC에 걸린 이해관계가, 그 이해당사자의 권력이, 보건복지 SOC와 주민의 삶의 질에 연관된 권력보다 힘이 세다. 물론, 그 경제는 정치적 경제이다.
이 권력의 완고한 균형을 바꾸어야 사람이 살길이 보일 것 같다. 아무 부끄럼 없이 나오는 이런 소식들을 보면 말이다.
“대한건설협회 회장은 22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내년 SOC 예산 확대를 위해서 국회도 찾아다니면서 많이 노력하고 있다. SOC 투자 축소로 향후 4년간 산업생산이 46조, 일자리 29만여개 감소할 것으로 우려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만 국회에서 SOC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아 다행이다. 내년 예산이 당초 18조5000억원에서 20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사 바로가기)
“경북도는 영일만대교가 포함된 동해안 고속도로 건설의 정부 예타 면제 사업 선정을 위해 마지막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여기에 영일만대교 건설을 바라는 포항지역 정치권도 힘을 보태고 있다….경북도지사는 15일 세종정부청사와 서울청사를 잇따라 찾아 기획재정부 장관과 국가균형발전위원장을 만났다….포항시의회는 22일 본회의장에서 동해안 고속도로 건설 사업의 예타 면제 대상 선정을 요청하는 건의문을 채택했다. 더불어민주당 대구경북 지역 원외위원장들도 14일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만나 대구경북 현안을 건의하면서 동해안 고속도로 조기 착공을 포함시켰다.”(기사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