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한국 ‘지식체제’의 젠더 불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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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소동’에 관한 한 그래도 올해는 사정이 좀 나아 보인다. 우리는 언제쯤 과학 분야 노벨상을 받을 수 있을까 한탄과 불만, 이에 편승한 자기중심적 주장은 줄어든 듯하다. 다만, 일본은 어떻고 어디는 이렇다는 올림픽형 비교는 여전하다. 우리 사회에서 (억지로라도) 지식생산과 그 체제를 생각하는 흔히 않는 기회가 아닌가 싶다.

 

주로 연구, 학술, 지식을 다루는 (한 줌도 되지 않는) 사람들 일이지만, 요즘은 습관처럼 수많은 학술행사가 있는 계절이기도 하다. 왜 그런 행사를 하는지 상당수는 목적과 목표를 알 수 없으니 습관이라 부른다. 끈질기게 비슷한 형식과 내용으로, 때로 ‘산업’이 될 정도면 이 또한 지식 ‘체제’라 할 만하다(산업발전 차원에서 학회 개최를 지원하는 지자체도 있다).

 

우리 또한 모종의 지식 ‘생산’과 ‘유통’을 주업으로 하는 터라 지식과 관계가 있는 체제와 이에 영향을 미치는 권력관계가 오랜 관심사다. <시민건강연구소>라는 이름으로 한국 지식생산의 주류, 대학이나 공공연구소와 달리 ‘독립연구소’를 표방했으니, 지식체제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에 속한다. 지식체제와 권력관계를 탐구하고 이해하는 작업 또한 우리 연구소의 핵심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계에 의한 ‘식민지화’, 젠더 편향, 국가주의, 기후위기에 대한 무감각, 식민주의와 식민성 등이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한국 지식체제의 특성이라 생각한다(체계적, 종합적 목록은 아니다). 어느 것 가릴 것 없이 꾸준히 공부하고 탐구해야 할 주제들로, 앞으로의 작업을 지켜봐 주시기 부탁드린다. 다만, 이 <논평>은 본격적인 작업 형식이기 어려우니 문제의식을 확인하는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겠다.

 

본론에 앞서, 지식체제에 작동하는 권력관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간단한 예. 암을 치료하는 ‘혁신’ 신약과 비교하면 결핵에 잘 듣는 신약이 개발되는 속도가 훨씬 느리다. 이유는 짐작하는 그대로, 지식 생산의 어려움보다는 수익 가능성에 차이가 크기 때문이고, 이때 지식은 기업, 자본, 시장 논리에서 떨어질 수 없다. 그 유명한 노벨 경제학상의 ‘편향’ 그리고 이와 관계가 있는 지식의 권력관계는 다시 말하는 것조차 새삼스럽다.

 

오늘은 한국 지식체제의 가장 중요한 특성 한 가지로 특히 젠더 편향성을 다루려 한다. 중요성도 그렇지만 세계적으로도 지금 논의의 한복판에 있다는 이유가 크다. 사실 꼭 한국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으니, 한국의 문제는 이중적이다. 지식체계라는 관점에서는 젠더 편향성 그 이상으로 관심과 의식, 노력이 ‘갈라파고스’에 머물러 있는 현실을 중요한 문제로 삼는다.

 

생생한 ‘편향’ 현상은 어디서나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주위에 무슨 학술행사나 토론회, 공청회, 세미나 따위가 있으면 내용에 앞서 사람을 살펴보시라. 발표자와 토론자의 젠더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숫자를 헤아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요즘 요원의 불길처럼 퍼지는 영어 신조어, 매널(manel)이 그 어느 곳보다 잘 들어맞는 사회가 또 있을까. 이제 꽤 유명해진 이 말은 모든 토론자(패널, Panel)가 남성(Male)임을 비틀고 비판하는 신조어다. 최근까지도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갔을, 한국에서는 그야말로 ‘자연’스럽다. 매널로 귀결되는 중간 원인과 권력구조, 학술단체와 조직의 간부와 임원의 젠더 구성은 더 심할 수도 있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어디 한둘일까. 알고도 바꾸기 어려운 환경과 조건 또한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그 오랜 틀이, 습관과 익숙함, 자연스러움, 기존 경로의 시효가 다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도 현상이지만, 그냥 토대와 여건이라는 핑계 뒤에 숨는 것이 더는 가능하지 않다.

 

최근의 대표적 예. 올 6월, 미국 국립보건원의 수장은(백인 남성!) 앞으로 남성으로만 구성된 토론회에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국립보건원 성명, 뉴욕타임스의 관련 기사, 한 달 전쯤에는 그 유명한 학술지 <네이처>가 ‘매널’에 더해 ‘맨퍼런스(manference)’라는 신조어까지 동원해 과학 분야 학술행사의 변화를 촉구하기에 이르렀다(관련 기사)

 

여기서 한 걸음 더, 이제는 현상을 넘어 근본까지 바꾸려는 시도가 거칠고 과격하다 할 정도로 거세다. 학술행사의 젠더 구성은 체제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으며, 특히 전체 체제의 성격을 나타내는 최종 산출물 내지 ‘대리지표’에 가깝다. 토론자로 나온 사람의 젠더 구성이 어떨 때는 그 분야의 교육, 연구자와 전문가 훈련, 직장과 고용, 경력 발전, 자원 배분, 리더십 등이 모두 작용한 결과다. 어떤 분야의 권위자로 성장할 기회가 압도적으로 불리하면 매널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니 토론회나 행사에서 젠더 격차를 줄이(려)는 것만으로는 턱도 없다. 더 근본적이어야 한다. 체제 수준에서 패러다임을 바꾸고 개혁 작업을 하지 않으면 그 피상적인 성과조차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성과를 금과옥조로 삼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즉시 그리고 끊임없이 옛 질서를 복원하려 들 것이 틀림없다.

 

노파심에서 부언하자면, 젠더 불평등을 비판하는 것은 다른 가치를 달성하는 데, 예를 들어 경제가 성장하거나 학술적 업적을 내는 데 불리하기 때문이 아니다(예를 들어 세계경제포럼이 말하는 젠더 불평등 문제 (관련 자료).

젠더 평등은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내재적 가치다. 불평등은 불의이고 억압이기 때문에 극복되어야 하며, 그것만으로 고유하고 특별한 의미가 있다.

 

지식체제와 구조라 해서 마냥 추상적이고 먼 것이 아니라 현재이고 정책이며 개혁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가히 ‘혁명적’이라 부를 만한 시도와 노력이 한둘이 아니지만, 어떤 것은 곧 주류가 되고 제도가 될지도 모른다. 다음은 보이는 대로 고른 몇 가지 예다.

 

  1. 영국 옥스퍼드 대학 철학과는 2018년부터 교수가 학생들이 읽어야 할 문헌목록을 작성할 때 적어도 40%는 여성 철학자의 글을 포함하도록 요구한다(기사 바로가기)
  2. 아일랜드는 교수직의 젠더 격차를 완화하기 위해 여성만 지원, 채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2019년부터 3년간 45명의 여성 교수를 확충할 예정이다(기사 바로가기)
  3. 2019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에티오피아의 아비 아흐메드 총리는 20개 장관직 가운데 10명을 여성으로 임명했다(기사 바로가기)
  4. 정치학 분야 저명 학술지인 미국정치학회보(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는 2020년부터 활동할 편집인 12명 전원(!)을 여성으로 구성하고, 젠더와 인종 등의 대표성을 강화하려는 조치임을 명백히 했다(기사 바로가기)

혹시 지나치게 급진적으로 보이는가? 이런 변화가 불안한가? 또는 현재 조건과 토대를 무시한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방법들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역차별’이라며 불만을 표할 사람도 한둘이 아니리라.

 

한국은 다르다고? 그것도 다 좋다. 토론도 괜찮고 ‘점진적’인 접근이 필요할 수도 있다. 다만, 수많은 사람이 지금도 불평등과 억압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런 변화가 차별과 구속을 넘어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한 삶의 기회를 여는 사상 첫 번째 시도이자 기회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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