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말로 표현하기도 어렵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다. 말 많은 ‘갑을’ 관계는 이제 갈 데까지 가서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청와대 대변인 사건은 그 중 압권이다.
양상은 달라도 흐름은 일관된다. 봉건과 권위주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시장과 관료제가 그토록 자부해마지 않는 능률과 효율성은 형식으로도 작동하지 않는다. 마치 조선 시대에나 있음직한 일들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 것은 당혹스럽다.
‘지체된 근대’가 한국 사회의 특징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봉건적 잔재가 시장의 겉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이 그나마 꼴은 근대라고 불러야 할까. 겉으로는 시장의 합리성을 내세우지만 허울뿐이다.
물론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피지배 계급이 신분적 예속에서 벗어나 해방되었다고 서양 경제사는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부분적으로만 진실이고, 해방되었다는 그들이 얻은 자유 역시 부분적이었을 뿐이다. 경제적 예속이 존재하는 한 신분의 해방은 불완전하다.
그 중에서도 한국 자본주의의 봉건성은 유난스러운 점이 있다. 자본주의나 근대의 형성과 발전을 어떻게 설명하든, 봉건의 유산은 곳곳에 남아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반(半)봉건’이라는 규정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장과 봉건의 기묘한 결합은 어렵지 않게 경험하는 일상이다.
재벌 체제의 비(非)자본주의적 성격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봉건성은 그보다 훨씬 더 일상적이다. 그 누구도 여기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없을 정도다.
예를 들어 사회적 가치와 관계없이 어떤 직업을 낮추어 보는 일은 흔하다. 학벌이 남다른 위력을 발휘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 신분재(財)가 사회적 성취의 바탕이 된다는 것은 상식이 된 지 오래다.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라는 외피 속에 남아 있는 봉건적 잔재는 언제라도 ‘사고’를 칠 수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남양유업 사건이나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은 몇 가지 예에 지나지 않는다. 오너를 위해 갖가지로 동원되는 직원들을 무엇이라고 설명할 것인가.
한국 자본주의의 봉건성은 분야를 가릴 것 없이 사회 전체의 특성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봉건적 관행과 전통으로는 의료만큼 의심을 많이 받아 온 분야도 드물다(일단 군대는 빼놓자). 환자와 의료인 사이에서, 의료인과 의료인 사이에서 그리고 같은 직종 안에서 봉건의 분위기는 차고 넘친다.
우선 환자와 의료 전문직 사이에서 치우친 권력 관계가 작동한다. 늘 말하듯이, 가지고 있는 정보와 지식이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는데다, 환자가 늘 곤궁하고 불리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봉건적 사회관계는 정보와 지식의 불균형을 질적으로 변화시킨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악마의 맷돌’처럼 모든 것을 삼켜도 환자와 의료인 사이는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환자는 늘 ‘을’의 처지이고, 그 흔한 소비자 주권이나 소비자 운동도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
의료인과 의료인 사이에 남아 있는 봉건적 관계도 문제다. 특히 의사(치과의사, 한의사를 포함해서)와 다른 직종 사이에는 강한 위계가 존재하고 ‘상명하복’이 익숙하다. 업무의 분장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업무에 그치지 않고 전반적인 인간관계와 사회관계까지 영향을 미친다.
불평등하고 권위주의적인 상호 관계는 같은 직종 안에서도 나타난다. 생명과 응급을 다루는 업무의 특성 때문이라는 사람이 있지만 미심쩍다. 그런 특성이 없는 영역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도 진작 없어졌을 것 같은 행태가 흔히 나타나는 것을 보면, 봉건은 구조일 뿐 아니라 ‘문화’임이 분명하다.
의료 전문직이 만들어내는 봉건적 관계가 비교적 오래 된 것이라면, 전(前)근대적 권력이 작동하는 또 다른 영역이 병원 자본과 노동의 관계이다. 이것은 흔히 보는 한국 사회의 갑을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의료의 ‘전통적’인 봉건성과 경제 권력이 만드는 새로운 신분제가 통합된 꼴이라고나 할까.
신분적 예속과 억압이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침해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사회 경제적으로 또는 권력 관계에서 불리하고 약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 이들이 막말을 듣고 모욕을 당해야 할 이유라면?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존엄하다는 기본 원칙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할 것이다.
사람 사이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적 관계는 ‘내재적’ 가치(그 자체로 가치 있다는 의미에서)만 가진 것이 아니다. 의사와 환자 사이가 대등한 관계에서 협력하는 것이 치료 효과를 높인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영국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환자와 의사의 ‘공동 결정’은 이런 효과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의료 전문직 사이에서, 또는 한 직종의 의료 전문직 안에서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적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현대 의료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해야 충분한 효과를 발휘한다. 치료에 참여하는 쪽만 봐도 팀워크와 협력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한 마디로 말해, 이제 독불장군과 같은 의료는 불가능하다.
결국, 평등하고 자유로운 인간관계가 좋은 보건의료 서비스를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갑과 을이 명확하고 그나마 봉건적, 권위적, 비합리적 관계에서는 원활한 의사소통과 협업이 이루어질 리 없다.
그렇다면 ‘갑-을’의 관계를 넘어 새로운 상호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우선, 누구나 알듯 형식만 바꾸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문서에 ‘갑’과 ‘을’이라는 문구를 쓰지 않겠다는 미봉책은 차라리 코미디다.
치우친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 구조가 더 중요하지만, 일단 여기서는 접어두자. 앞에서 말한 대로, 봉건의 잔재는 또한 문화이기 때문이다. 문화 역시 권력의 불균형과 무관하지 않지만, 인식과 감각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또 한 가지, 갑과 을의 ‘미시적’ 상호관계가 중요하다. 이는 문화보다 권력의 불균형을 더 크게 반영한다. 아주 간단한 예로, 노동조합이 있는 곳과 없는 곳, 환자 단체가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생각해 보라.
어느 쪽이든 주도권을 가진 쪽은 ‘을’이다. 여기서 주도권은 실천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한참 여론이 끓고 있지만, 단언하건대 을의 처지를 공감하는 분위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갑이 변화하는 것은 도저히 못 견디는 때 그 때뿐이다. 달리 말해, 을이 바뀌지 않으면 갑도 바뀌지 않는다.
한때의 여론이나 유행, 그 분산된 힘에 큰 기대를 걸기 어렵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쓰자. 을의 ‘반란’이야말로 문화를 바꾸고 미시적 권력 관계를 움직이는 중심이다. 전적으로 ‘을’이 어떻게 조직되고 새로운 힘을 갖게 되는가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