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9년 미국 듀크 대학 심리학과의 파스코 교수 팀이 쓴 논문이 미국심리학회가 내는 <심리학회보>란 전문 학술지에 실렸다(바로가기). 차별을 느끼는 것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한 논문이다. 그 때까지 비슷한 주제를 다룬 134편의 논문을 다시 분석한, 말하자면 ‘종합’ 연구였다.
예상한 대로(!) 차별은 건강에 나쁘다는 것이 결론이다. 차별은 정신 건강은 물론이고 신체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트레스가 올라가고 건강에 나쁜 습관이 늘어나는 것이 건강이 나빠지는 중요한 이유였다.
2.
2009년 미국 공영방송(PBS)이 시리즈로 방송한 ‘부자연스러운 원인: 불평등이 건강을 해치는가?’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여러 사례가 나오는 데 그 가운데 하나가 킴 앤더슨이라는 성공한 흑인 변호사 얘기다 (바로가기).
앤더슨은 1990년에 첫 애를 가졌고 건강한 애를 낳기 위해 다른 엄마들과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했다. 그렇지만 예정일을 두 달 반이나 앞두고 저체중아를 낳는 불행을 겪었다. 성공한 흑인이었으니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는 여느 백인에 부러울 것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많은 가난한 흑인 여성과 다를 바 없는 경험을 해야 했다.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신생아 전문의는 이런 일이 드문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흑인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소득이 높아도 저체중아를 출산하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이다. 이들이 제시하는 원인은 다름 아니라 인종 차별이다.
3.
한국에서 차별은 아직도 낯선 말인 것 같다. 인종 문제가 적으니 미국처럼 노골적인 차별은 별로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종류만 다를 뿐 한국에서도 여러 차별이 알게 모르게 작동한다. 차별이라고 의식도 못하는 그런 차별이 사실 더 문제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차별도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2012년 김승섭 교수가 발표한 연구가 그런 증거를 보태 놓았다 (바로가기). 모두 여덟 가지 상황으로 나누어 노동자들에게 차별 경험을 물었는데, 교육, 나이, 성별 등이 차별의 중요한 이유로 드러났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차별과 건강 수준(자가 평가)은 상관관계가 높았다.
앞의 세 가지 사례는 배경이나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차별이 건강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것은 같다. 차별의 종류와 양상이 다를 뿐, 차별은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해친다. 그래서 차별은 심각한 건강 ‘위험요인’이다.
차별이 건강에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이미 알아차렸을 듯싶다. 합리적 이유 없는 모든 형태의 차별을 금지하는 이른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 기약 없이 미루어졌다.
직접적 이유는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기독교계의 반대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 말고도 한국 사회에서 차별은 공공연하고 구조적이다. 그리고 아직 그리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결과가 거듭되는 입법 좌절이라 해야 할 것이다.
차별금지법이 무산된 역사는 이미 충분히 길다. 2007년과 2010년 두 차례 시도되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2007년의 첫 차별금지법은 보수 기독교단체 등이 주로 ‘성적 지향’ 항목을 두고 반대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었다. 법제처는 학력, 성적 지향, 병력, 출신 국가 등 일곱 개 항목을 제외하고 심의를 진행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상황은 비슷하다. 일부 보수 기독교계가 다시 강력한 반대 진영으로 나섰고, 입법을 추진하던 의원들이 물러섰다. 반대 이유도 그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역시 핵심은 동성애를 비롯한 ‘성적 지향’ 항목이다.
다시 논란의 한복판에 선 성적 지향을 가지고 새삼스레 왈가왈부할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 과학적으로 이미 충분히 설명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차별도 사실 여부는 충분히 확인되어 있는 것 아닌가 싶다.
문제는 차별 ‘인식’이다. 우리 사회가 차별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가 여전히 중요하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논리는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다. ‘종교’ 항목을 두고는 “반사회적·반윤리적 집단인 이단을 합법화한다”고 주장한다. ‘사상’ 항목을 두고는 “‘종북 사상’을 전파해도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 반대하는 주된 이유다.
역차별 논리에 이르면 차별을 얼마나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데도 이를 표현하지 못하게 하면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이유 때문에 채용되지 못하면 능력 있는 사람이 채용에서 역차별을 받는다는 소리도 들린다. 차별금지법을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인데, 그러고 보면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근거를 스스로 제공한다고 해야 할까.
차별을 금지해야 하는 이유가 자살이나 질병처럼 나쁜 ‘결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라면? 이건 앞에서 말한 연구결과 그리고 자살을 비롯한 많은 사례로 충분하다. 차별은 편견, 낙인, 사회적 배제로 연결되어 개인을 병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한다. 앞뒤 순서를 가릴 수 없을 만큼 문제는 서로 맞물려 있고 종합적이다.
정신질환 ‘병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자. 정신질환을 이상하게 보고 낙인을 찍는 일은 아직도 드문 일이 아니다. 여기까진 그래도 개인적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차별은 이에 뒤이은 사회적 행위이고 사람을 사회적 공간에서 몰아내는 ‘배제’라 불러야 한다.
정신질환을 앓은 사람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사회의 반응은 어느 한 가지를 가리지 않는다. 의료, 주거, 취업, 교육, 언론, 보험 등 거의 대부분 영역에서 일어난다. 조금 시간을 지났지만 영국의 한 조사가 그런 차별과 배제의 결과를 잘 보여준다. 정신질환자의 69퍼센트는 차별을 걱정한 나머지 구직을 포기한 경험이 있고, 50퍼센트는 다른 치료를 받을 때 차별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차별을 금지하고 없애야 하는 이유는 건강이 나빠진다는 것과 같이 어떤 나쁜 결과가 생기기 때문만 아니다. 설사 그런 나쁜 결과가 별로 없다 하더라도 차별은 모든 사람이 꼭 같이 존엄하다는 보편적 인권의 원리에 반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자체로 나쁘다.
그래서 차별 금지는 국제사회의 보편적 규범이다. 오죽하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한국의 동성애 혐오를 지독한 인권침해라고 표현했을까. 국가 기관의 노력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보냈을 정도다. 한국 기준으론 가끔 보수적이란 평을 듣는 그로서도 그냥 보고 있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지금도 누군가는 나이를 이유로, 출신지가 어디여서, 학력이 모자라서, 생김새가 어때서 차별을 받고 있다. 차별을 익숙한 것으로 ‘내면화’한 덕분에 받아들이고 있을 뿐, 우리 또한 차별로 고통 받고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또 다른 피해자다.
마땅히 차별은 없어져야 한다. 차별금지법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의 ‘사회적’ 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하는 최소한의 지침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살려내어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 맞다. 힘을 합하여 응원하는 것이 민주공화국의 시민 된 도리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