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산재와 기울어진 힘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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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8일은 국제자유노련과 국제노동기구가 정한 세계산재사망 추모의 날이다. 1993년 태국의 한 인형공장에서 188명의 노동자들이 화재로 숨진 사건을 기리는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지난 주 방글라데시에서는 수출용 옷을 만드는 8층 공장 건물이 무너졌다. 지금까지 최소한 360여 명의 노동자가 죽었다는 소식이다. 산재사망추모의 날이 만들어진지 2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세상은 크게 바뀌지 않은 것 같다.   
 
한국도 강 건너 불구경이라고 할 처지는 아니다. 몇 십 년째 얼마나 죽고 다쳤는지 따지지만 늘 세계 최고수준이라는 상황은 그대로다. 2012년만 하더라도 하루 평균 252명이 다쳤고 5명이 목숨을 잃었다(정부 공식통계가 그렇다). 
 
산재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산재를 보건 문제, 건강의 과제로 보지 않는 태도를 지적해야 하겠다. 담당 부처가 달라선지, 전문성의 칸막이 때문인지, 산재는 늘 노동만의 문제로 취급된다. 명토 박아 두자. 산재는 노동 문제이면서 동시에 건강의 문제다. 집단적으로 죽고 다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공공보건 문제가 어디 또 있을까.   
 
산재를 생각하는 첫째 질문은 이것이다. 좀처럼 이해하지 못할 이런 비상식적 상황이 왜 이렇게 오래 계속될까. 어떤 건강 문제라도 이런 심각성이면 무슨 대책이라도 만들어졌을 것이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꼴로는 신문에 나고 방송 전파를 탔으리라. 그러나 집단 망각이다. 
 
가장 먼저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생명의 값을 돈으로 바꾸는 노골적 경향 때문이다. 구조적으로 이야기하면, 목숨 값이 상품으로 거래되는 시장경제의 상품화 경향이 이렇게 만든다. 아예 노동 ‘시장’이라고 하지 않던가. 벌금을 내든 다른 노동자를 구하든 사고 예방과 보호에 드는 돈보다 그 편이 싸다. 
 
산재를 줄이려는 노력은 어떤 쪽에서는 이미 여기까지 와 있다. 살인에 버금가는 처벌이다. 노동자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기업살인처벌법’ 입법을 요구해왔다. 이제 국회에서도 몇몇 국회의원들이 비슷한 취지의 법을 발의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단속도 벌금도 소용없다면 강력한 처벌이 그나마 약간의 효과가 있을까 한 가지 ‘고육지책’이다.  
 
당위성은 명확하지만, 지금까지 봐 왔듯이 법 제정이 쉽지 않을 것은 뻔하다. 입법 실무적인 문제도 적지 않다. 산재의 구조가 한국의 경제와 산업 전반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민은 당연하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도 대안이 될 수 있다(프레시안 기사 바로가기 ).  
 
하지만 ‘권력’의 불균형이 교정되지 않으면 처벌과 배상만으로 열악한 현실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재벌의 전횡을 방지하려는 많은 제도가 좋은 예다. 수많은 행정과 입법, 사법적 심판에서 보듯 막상 현실에서 어떻게 운영되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한 마디로 힘의 논리가 작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산재도 마찬가지다. 노동자가 가진 힘이 더 커지지 않으면 행정과 입법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행정과 입법의 구조를 바꾸기 어려울 뿐 아니라, 설사 법이 만들어지고 규제를 한다 하더라도 또 다른 과제가 생긴다. 그 많은 현장에서 그것도 미시적 수준에서 법을 강제하는 것은 처음부터 관료제의 능력을 벗어난다.
 
더 중요한 것은 산재의 구조 자체에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을 산재로 볼 것인가가 대표적이다. 산재는 원칙적으로 노동으로 인한 건강문제이고, 이는 노동자의 전반적 건강 문제와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산재는 법률의 규정으로 좁아져 있고, 죽고 다치지 않으면 산재에서 의도적으로 분리된다. 산재 범위 안에 있어도 그 때마다 인과관계를 다툰 후에야 ‘인정’된다. 삼성전자의 백혈병 사건이 대표적이다. 
 
가장 큰 구조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산재와 노동 건강을 부차적이거나 불가피한 것으로 보는 노동 이데올로기다. 노동은 극도로 상품화되어 있고, 경제와 이윤, 성장을 위해 노동자의 생명이 소모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심지어 많은 노동자들조차 스스로 그렇게 받아들인다.  
   
결국 기울어진 권력관계는 작업장부터 한국의 사회경제체제까지 모든 수준에 걸쳐 있다. 산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힘을 균형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관통하는 핵심 전략은 ‘민주주의의 심화’로 요약할 수 있다.  
 
일차적으로 개별 작업장 수준에서 민주주의가 강화되어야 한다. 그냥 이렇게 소박하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산재를 줄이는 데에 작업장의 민주화는 더 이상 중요할 수 없는 과제다. 
 
작업장의 위험요소와 예방방법을 알 권리, 안전보건활동에 참여할 권리,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작업을 거부할 권리는 노동자가 가진 대표적 권리다. 이들 권리는 작업장의 민주주의 없이 보장되지 않을 뿐 아니라, 처음부터 권리로 성립하기조차 어렵다.
 
중간 단계, 즉 정책 수준의 참여를 강화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산재나 노동안전보건과 직접 연관된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지만, 작업장에서 일어나는 손상과 질병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이것만이 아니다. 근무시간, 노동조건, 고용관계 등 대부분의 노동 정책이 직접, 간접으로 관련을 맺고 있다. 
 
따라서 참여와 정책결정의 민주화는 산재 또는 노동안전보건을 한 가지 특수한 과제로 보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전반적인 민주적 역량을 강화하고 정책의 ‘정치화‘가 동시에 필요하다. 
 
산재를 줄이는 것은 여기서 더 나가야 가능하다. 노동이 사회경제적으로 제 자리를 찾는 수준까지 가지 않으면 앞에서 말한 작업장과 정책 수준의 참여도 가능하지 않거나 부분적일 뿐이다. 노동은 사회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더 민주화되어야 한다. 
 
최근 국회는 ‘대체휴일제’ 입법안 논의를 9월 정기국회로 미뤘다. 제도가 도입되어야 겨우 이틀 휴일이 늘어나는 것이지만, 재계와 여당, 정부가 힘 모아 함께 반대했다. 반대 논리는 늘 보던 그대로다. 기업의 부담이 늘어난다, 생산성이 떨어진다, 경제가 어려운 시기다, 결국 소비자 부담이다 등등.
 
세계 최고 수준의 노동시간을 ‘정상화’시키는 작은 걸음도 이렇게 어렵다. 산재를 줄이고 노동자의 건강 보호를 위한 어떤 노력도 사실상 이런 반(反)-노동의 ‘동맹’과 맞서야 한다. 이 동맹을 뒷받침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포획당한, 그리고 노동자조차 이미 내면화한 상품 노동의 논리다. 대체휴일제 도입에 반대하는 논리는 여기서도 꼭 같은 모습으로 옹벽처럼 공고하다.  
 
노동의 민주화는 노동이 제 값만큼 정치적으로 대표되는 것을 뜻한다. 제도 정치를 통한 대표체계가 중요하지만, 반드시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산재를 아무렇지 않게 보는 정치, 경제, 정책의 뒤에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소외’된 노동이 있다. 노동자이면서 스스로 노동을 소외시키는 현실. 
 
환원주의적으로, 근본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소리는 아니다. 구조적으로는 힘의 균형이 견고한 경우에도 많은 기회의 창이 있을 수 있다. 어떤 구조도 틈이 있고 자주 동요하기 때문이다. 산재를 줄이고 노동을 건강하게 하는 것은 이런 기회의 창을 활용해야 한다. 
 
이와 함께 노동의 민주화를 다시 기획할 수밖에 없다. 작업장에서 사회경제체제에 이르는 민주화 과제는 중층적인 동시에 통합적이다. 과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맞물려 있다. 토대와 전체를 아우르는 이 기획에 힘을 보태야 한다. 
 
산재로 목숨을 잃은 많은 노동자들의 명복을 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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