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새로운 집단 감염을 줄이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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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터져 나온 새로운 집단 감염에 대해 “내 그럴 줄 알았다”라고 할 생각은 없다. 확진자가 그대로 줄어들어 영 나오지 않기를 바라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 모두의 기대나 희망과는 어긋났지만, 감염병 전파에서 영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바라기는 이 ‘경고’가 더 큰 사태로 번지지 않고 웬만했으면 좋겠다. 모든 당사자의 피로감이 최고조에 이른 현실 때문에 바람이 더 간절하다. 만에 하나 큰 유행으로 번지면 지난번과 같은 정도로, 젖먹던 힘까지 내기가 쉽지 않다. 피해가 더 커질 수도 있다.

 

그런 탓인지 개인과 그들의 행동을 싸잡아 탓하는 분위기가 거세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감염병 확산의 원리로 보면 ‘원인의 개인화’는 과학적이지 않거니와 특히 유행 억제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개인에 대한 비난, 차별, 혐오에 이르면 방역은 점점 더 어렵고 효과가 떨어진다.

 

 

여기서는 다시 기본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일이 생겼으니 아마도 여러 행정 조치가 다시 나올 것이다. 학교 개교 문제도 영향을 받을지 모른다. 현재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경과일 터, 그러나 국가권력이 주도하는 ‘명령-순응’ 모델, 그것도 ‘중앙집권형’ 관리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처지는 아쉽다.

 

이번에는 클럽을 비롯한 유흥업소라 치고, 앞으로 다른 집합 시설에서 비슷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곧 개교할 예정인 학교는 어떤가? 한때 논란의 초점이었던 종교시설은? 콜센터 등 사람이 많은 작업장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일이 생길 때마다 중앙 방역 당국이 모든 힘을 다해 의심자를 찾고 동선을 추적하는 일을 되풀이할 것인가.

 

처음 닥치는 일이 아니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상황인 만큼 우리는 한 달 전에 이 <논평>을 통해 준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교실, 교사, 학생, 강의, 급식, 그 어느 한 가지로 모두 대비할 수 없다. 종합 접근이 필요하되,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대학, 직장, 종교 모임 등 다른 사회적 거리 두기도 다른 바 없다.”

 

아마도 정부 당국도 지난 몇 주간 “준비하노라고 했다”라고 말할 것이다. 동의한다. 유행을 부추길 가능성이 있는 여러 시설이나 공간에 대해 ‘생활방역’을 준비한 것이 사실이다. 일일이 딱 맞는 맞춤형 준비라 하기는 부족하겠지만, 일반적 지침이 얼마나 실용적일 수 있을까 딱히 부실하다 하기도 힘들다.

 

의미도 있다. 물품을 준비하고 시설을 바꾸는 것, 개인 예방 지침을 준비하고 실천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일, 확진자가 생기면 어떻게 조치한다는 등의 절차는 중요하고 또 필요한 일이다. 이만해도 새로운 집단 감염의 가능성은 꽤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데도 이런 일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예상 범위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미흡하다. 준비론이라는 관점에서는 구체적 이유가 무엇이든 소홀했다 할 수밖에 없다. 예상했건 결과론이건, 오늘 새로운 집단 감염은 준비가 성공하지 못했음을 뜻한다.

 

남 탓을 하는 것도 곤란하다. 적어도 준비에 관한 한 개인을 탓하거나 업소에 책임을 묻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 준비란 그냥 발표하거나 명령하거나 전달하는 것만으로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과 집단의 최종 행위까지 포함한다.

 

유일한 원인이라고 하기는 어려우나, 우리는 준비의 또 한 가지 측면이 빠진 것이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준비는 분명 기술(실무)을 중심으로 하지만, 같은 정도로 중요한 것이 바로 ‘과정’이다. 준비 과정 또는 과정으로서의 준비. 상황을 파악하고, 준비의 필요성을 받아들이며, 개인과 집단에 필요한 기술을 이해하고 익숙해지는 것, 이런 방역의 토대는 과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거듭 강조한다. 방역이 사회적이고 문화적이며 경제적인 것을 포함하는 한, 그리고 개인과 집단의 실천을 전제하는 한, 그 기술 그대로 개인과 집단에 실천될 수 없다. 완전한 실천과 실현은 불가능하다. 이번 감염이 발생한 뒤에는 클럽 대신 다른 유흥업소에 사람이 몰린다지 않는가. “죽을병도 아닌데 걸리면 어떤가”라고 하는 젊은이가 한둘이 아니라면 그 어떤 방역 지침과 기술도 무위로 돌아간다.

 

앞서 인용한 <논평>에서 이미 주장한바, 그리하여 “준비는 논의와 공론화 그 자체다.”

 

개학과 개학 연기는 학생과 학부모마다 처한 조건이 있고, 인식이 다르며, 원하는 바도 각양각색이다…. 사회적 논의와 합의, 그리고 공감대만이 이 곤경을 해결할 수 있다….‘공동의 책임’ 또는 ‘사회적 책임’으로 공유되고 배분되어야 한다.

 

지루하고 비효율적이어도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 온갖 군데서 배우고 논란을 벌이며 결의와 반박이 분출해야 한다. 결코, 개인과 집단에 책임을 넘기자는 뜻이 아니다. 코로나19 유행의 특성을 생각할 때 국가와 중앙 정부 중심의 방역만으로는 부족하므로 참여와 주도는 ‘옵션’이 아니라 필수다.

 

물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일은 늘 어렵다. 나 개인의 삶에 이를 정도면 그 어려움이 더하다. 분권화와 민주적 공공성의 경험이 미약한 가운데, 시민주도형 방역이 무슨 수로 하루아침에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최소한의 기반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지금은 그저 운을 떼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어느 세월에? 싶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해야 이번 겨울에, 내년에, 또는 다음 유행을 맞을 준비가 된다. 시작도 중요하다. 작은 경험이라도 개인과 집단이 또 다른 주체가 되어야 하며, 그런 점에서 이미 권력 자원을 가진 정부가 ‘시민참여형’ 또는 ‘시민주도형’ 방역을 촉진해야 한다.

 

노파심에서 말하는데, 다수결 여론 조사와 참여를 혼동하면 곤란하다. 노동조합, 학생회, 상가번영회, 교회연합회, 무슨 협회의 분회가 새로 학습하고 논의하며 개입하는 정도가 되어야 참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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