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또 5월 18일은 지나갔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둘러싼 논란에서 정부가 보인 옹졸함은 차라리 연민을 느끼게 했다. 공공의 자산인 방송을 사유화한 종편의 선정과 편집증에는 한 마디 말조차 보태기 아깝다.
새삼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이 여기에 얼마나 큰 빚을 졌는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많은 사람이 지금 당연하다 여기지만, 가장 기본적인 권리조차 저절로 주어진 것이 어디 있으랴.
역사를 되돌리려는 시도는 늘 있지만 차곡한 축적을 쉽게 뒤집을 수는 없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진전시킨 역사적 사건으로, 5월 광주는 해마다 되살아난다. 더구나 이젠 오랜 기간의 금기를 깨고 공인된 역사가 되었으니 다행이다.
한편으론 30년도 더 지나면서 이제 역사는 국립묘지와 기념식으로 상징되는 ‘제도’로 굳어지는 것을 실감한다. 많은 이가 공적 공간에서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자칫 실질은 희미해지고 제도화된 형식만 남을까 걱정이 남는다.
그래서 더욱 기억할 일이 있다. 그 민주주의가 유례없는 국가 폭력 속에서 싹텄다는 점이 그것이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토마스 제퍼슨의 말은 여기에서만큼은 그저 문학적 표현이 아니다. 국가 폭력이 모양은 다르지만 현재 진행형이란 점에서 더욱 더 그렇다.
국가의 폭력은 그저 역사를 뭉뚱그려 표현하는 말이 아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추상화되고 그래서 손에 잘 잡히지 않는, 그저 은유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며칠 전에도 광주트라우마센터가 국가 폭력의 ‘일상성’을 보여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2012년 10월부터 광주 시민 300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정신건강 현황이다.
이 조사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43.2퍼센트가 “5·18을 생각하면 분노·슬픔·죄의식 등 매우 강한 정서를 느낀다”고 답했다. “5·18을 생각하면 땀, 질식, 가슴 두근거림 등 신체적 불안함을 느낀다”는 사람도 11.3퍼센트나 되었다.
이른바 ‘5월 증후군’을 앓는 사람이 아직 많다는 뜻이다. 1990년 전남대의 오수성 교수가 제안한 이 말은 5·18의 피해자나 관련된 사람들이 5월만 되면 무언가 불안하고 답답하며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증상을 가리킨다. 이처럼 국가 폭력은 각 사람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구체적 일상이다.
사실 국가 폭력은 한국의 현대사에서 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 전쟁과 학살, 고문 등 심각한 국가 폭력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한국 사람이 많다. 흔히 코소보나 르완다, 팔레스타인을 떠올리지만 얼마 전 바로 우리의 모습이 그랬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한국전쟁과 여러 집단희생사건을 겪었고, 광주민주화운동은 불과 30년 전에 일어났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역시 1987년의 일로, 그리 오래된 일이라 하기 어렵다. 양상과 강도는 다르지만, 국가 폭력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이런 국가 폭력의 직접적인(그러나 극단적인) 결과는 바로, 생명과 건강의 손상이다. 다른 무엇을 보탤 필요도 없이, 국가 폭력은 명백하게 몸과 정신을 파괴한다. 앞에서 말한 광주 시민의 정신적 문제도 국가 폭력이 몸을 통해 나타난 구체적인 결과물이다.
피해는 사망이나 장애처럼 비교적 명확하고 단기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특히 극단적인 것이 아닐수록 그리고 비신체적인 것일수록 간접적이고 장기간에 걸쳐 나타난다. 오래 남아 사람을 파괴하고 영혼을 피폐하게 만든다.
고문 피해가 대표적이다. 고문 피해자들을 조사한 결과, 오래 지속되는 후유증과 심리적 불안, 직접 관련이 없는 부위의 통증까지 나타났다고 한다(박원순. <고문의 한국현대사 야만시대의 기록>, 2006년). 피해의 특성 때문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증명하기 어렵지만 국가 폭력의 결과임을 의심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국가 폭력의 장기 효과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또 다른 예는 집단희생사건 경험자들이다. 경향신문 2010년 6월 19일자는 ‘진실과 화해를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심리적 피해현황 조사보고서>(2007년)의 내용을 보도했다 (바로가기).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집단희생사건 경험자들의 정신 건강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이다. 50년 이상 기간이 경과했는데도 38.9퍼센트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었고, 당사자뿐 아니라 2세대 가족들의 19.5퍼센트도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당사자뿐 아니라 자녀들까지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사회적 유전’이라 하겠다.
그나마 큰 사건과 널리 알려진 것에는 관심이라도 있는 편이다. 그렇지만 이런 사건들조차 체계적인 조사를 하고 결론을 내기가 매우 어렵다. 전통적인 인과관계를 따지는 ‘주류’ 과학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용산 참사나 쌍용차 사태만 봐도 그렇다. 이에 비해 덜 유명하고 작은 것, 특히 한두 개인에만 해당하는 것들은 아주 쉽게 묻힌다.
이래저래 국가 폭력과 그로 인한 건강 피해는 눈에 잘 띄지 않고 관심도 없이 그냥 지나가기 쉽다. ‘과소’ 평가된다는 뜻이다. 또는 의미와 가치보다는 법률적 다툼과 실증적 증명에 매몰된다.
건강 ‘효과’나 ‘피해’처럼 건조하게 표현할 수 있지만, 결국 이는 국가 폭력이 사람의 몸과 마음을 근본까지 파괴할 수 있다는 뜻이다. 국가 폭력은 건강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만, 달리 보면 건강은 국가 폭력의 비인간성과 반인륜성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낸다.
건강은 한편으로 국가 폭력을 드러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치유와 회복의 중심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첫째, 국가 폭력과 건강의 상호 관련성을 민감하게 인식해야 한다. 건강과 의료 문제는 원인과 관계없이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때가 많다. 흔한 문제 가운데에 섞인 국가 폭력의 피해는 밝히기 전까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건강 문제를 다루는 사람들의 ‘감수성’이 낮다면 폭력과 인권 침해는 그냥 묻힐 뿐이다.
둘째, 건강 피해를 회복하는 일이 중요하다. 국가 폭력 때문에 건강이 손상된 이들을 치유하는 것은 마땅히 국가가 책임을 다해야 할 일이다. 시간이 오래 지났다고 면제될 수 없다. 인권의학연구소 같은 민간 조직에 과중한 부담을 지우는 한심한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 한참 늦었으나 광주트라우마센터 같은 곳이 국가가 책임을 다한다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출발이 되길 바란다.
또한, 국가 폭력을 막는 보편적 노력에 다 같이 힘을 보태야 한다. 건강 피해는 최종 결과이자 현상으로 국가 폭력의 반인간적, 반인권적 속성을 드러낸다. 물론 이 때 손상이나 질병은 단순히 몸과 정신에 이상이 있다는 차원을 넘는다. 가장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삶의 가치가 훼손당했다는 징표이자 증거다. 그러나 또한 몸과 정신의 이상은 피해자의 회복 잠재력과 복원력을 벗어나는 극단적인 결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생생하게 드러나는 결과가 없더라도 국가 폭력은 삶과 사회의 가치를 무너뜨린다. 그런 점에서 ‘허용할 수 있는’ 국가 폭력이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역사가 되고 제도가 된 5월 광주를 통해, 평화와 인권을 옹호하는 사회적 연대가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