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국제기구’를 어떤 눈으로 보는가? 올 초 세계보건기구(WHO)를 둘러싼 시비에 이어 눈앞에 닥친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선출까지, 한국 사회에서는 올 한해 예외적으로 자주 국제기구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 사회가 개별 국가를 넘어 국제기구의 책임이나 기능에 관심을 두는 일은 드물다. 이유가 무엇이든 ‘국제화’ 수준이 높은 곳이라고 하기 어렵다. 예외는 이번 세계무역기구처럼 한국인이 사무총장 등 대표 선거에 나가거나 선출되어 직을 수행하는 때다.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세계보건기구의 이종욱 전 사무총장이 그랬고, 유엔의 반기문 전 사무총장도 마찬가지다. 이 정도 지위나 위상은 되어야, 개인 이야기를 하는 배경으로 국제기구나 그 역할을 조금 더 알게 되는 정도가 아닌가 싶다.
이번에는 세계무역기구 차례인 듯싶지만, 아직 선거 과정이라 당시의 세계보건기구나 유엔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언론과 여론이 관심을 두는 것은 아직 한국 사람이 뽑힐 것인가 아닌가 하는 정도를 넘지 않는다. 곧 결과가 정해진다는 세계무역기구 선거는 국제사회에 한국의 존재감과 위상을 높일 ‘기회’일 뿐인가?
세계무역기구는 특히 여러 국가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서는 데다 코로나19 유행 이후 자국 중심주의가 더 강해지는 추세에서 비켜나 있을 수 없다. 특히 경제적 이해관계와 직접 관련성이 크다. 당연히 국제관계의 ‘현실주의’가 더 강하게 작동할 수밖에 없으니, 한국 사회의 ‘국위’에 대한 관심은 단지 국가주의나 애국주의를 넘어 합리적인 태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국제기구 즉 세계무역기구를 중심에 놓고 보면 조금 다르게 볼 수밖에 없다. 한국 바깥에서 보면, 특정 국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좁게는 국제무역기구(기능과 역할) 넓게는 세계적 범위에서 국제무역기구가 제대로 역할을 하는 것이 ‘최선의 사무총장’을 정하는 기준이다.
원론은 간단하나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기준을 말했지만, 세계무역기구 또는 ‘세계’라는 관점이 공허하거나 추상적이라는 점이 큰 문제다. 세계무역기구와 그 사무총장이 모든 회원국과 국가들, 그리고 그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도록 일해야 한다는 규범은 모호하다. 말만 많을 뿐 현실에서는 무력한 기준이 되기 쉽다.
우리 연구소의 관심과는 좀 멀어 보이는 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 선거를 이처럼 장황하게 늘어놓는 데는 이유가 있다. 대부분 국제기구가 마찬가지지만, 세계무역기구도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세계사적 쓰나미를 피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나중이 아니라 지금 닥친 문제니 다음 사무총장 임기 안에 벌어질 일이기도 하다.
사무총장 선거에 출마한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은 팬데믹으로 큰 타격을 받은 ‘다자주의’를 복원하겠다는 공약을 강조했다고 한다(기사 바로가기). 이 또한 팬데믹에 직접 연관이 있는 사안이지만, 후보자 또는 당선자 어느 쪽으로든 더 직접적이면서도 더 곤혹스러운 도전에 맞닥뜨려야 한다. 바로 코로나19의 치료제와 백신을 둘러싼 지식재산권 문제다.
미리 말하지만, 어떤 문제를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권력 관계를 따르는 것이라 세계무역기구나 그 사무총장이 전혀 도전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서 권력 관계란 이 기구의 의사결정을 좌우하는 바로 그 힘의 관계를 말한다. 세계무역기구가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과 함께 정치경제 강대국, 서구, 기업과 자본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은 일부의 주장을 넘어 정설에 가깝다(자료 바로가기).
세계무역기구가 대응해야 할 지식재산권 논란은 현재 진행형이다. 가장 최근에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제품 개발을 가속하고, 제조를 확대하고, 효과적인 의료 기술 공급을 확대”하기 위해, 주로 저소득국가를 중심으로 세계무역기구가 역할을 하라는 요구가 빗발친다.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세계무역기구에 “코로나19 예방/억제/치료를 위해 무역 관련 지적재산권에 관한 협정(TRIPS)의 특정 조항 유예”를 제안했다(시민사회성명서 바로가기).
많은 국제 시민·사회단체와 전문가들이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의 지식재산권(특허)을 유예하는 안을 지지하고 있으나, 세계무역기구의 TRIPS 위원회가 이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자료 바로가기). ‘강대국’과 다국적 제약 자본의 막강한 힘이 코로나 팬데믹이라고 크게 달라질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출신 사무총장이라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코로나19를 둘러싼 지식재산권 문제에 그가 어떤 시각으로 어떤 판단을 하는지 잘 모른다. 국내와 국외를 통틀어 공식적으로 견해를 밝힌 적도 없는 것 같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그가 코로나19 지식재산권에 ‘전향적’인 자세를 보일 것 같지 않다. 선거 과정에서 어떤 회원국이 지지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겠으나, 어떤 측면에서도 치료제와 백신의 기존 구조를 벗어나야 하는 저소득국가의 압력에 민감하게 대응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나이지리아 출신 사무총장은 나을까? 아프리카 모든 국가가 똘똘 뭉쳐 이 대륙 출신 후보를 밀고 있지만, 그가 저소득국가들의 요구를 온전히 대표하리라 기대하기는 이르다.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후보는 세계은행에 오래 근무해 세계적인 ‘주류’ 정치경제 구조에 가깝고, 현재는 국제백신면역연합(GAVI) 이사회 의장으로 이 ‘연합’의 강대국 중심 국제 네트워크와도 밀접하다.
참고로, 국제백신면역연합은 주로 서구 강대국의 재원에 의존하면서 시장 원리에 토대를 둔 의사결정과 사업 방식을 추구한다. 일부에서는 이를 ‘게이츠 방식’이라 말할 정도이니, 조직과 활동의 정치경제적 기반은 분명 고소득국가, 다국적 대기업, 자본에 유리하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무역기구와 그 사무총장의 ‘양식’에 기대해 코로나19의 지식재산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진작부터 국제 정치경제는 도덕의 영역이라기보다 권력 관계의 장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인도주의와 국제보건의 윤리 같은 것만으로는 어려울 것이다.
요컨대, 세계적 범위에서 코로나19 백신을 보급하고 유행을 멈추려면 국제 통상의 ‘올드 노멀’로는 불가능하다. 물리적 힘이든 소프트파워든 세계무역기구와 그 관리자에 압력을 가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해야 한다.
그 한 가지 방식이 앞서 인용한 것과 같은 것, 즉 국제 시민사회가 중심이 되어 국제적 압력을 조직하는 방법이다. 특히 직접 이해관계를 넘는 고소득국가의 사회적 개입이 중요한데, 이는 다시 각 나라 시민사회의 지지와 요구 그리고 국제연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