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세계보건기구에 그대로 남고 코로나 백신의 국제협력 프로젝트인 ‘코백스’에도 참여하기로 했다. 대통령이 바뀌면서 보건에 대한 국제협력 체제를 서둘러 복원한 것으로, 이런 변화가 세계적으로 팬데믹 대응에 영향을 미칠 것이 틀림없다.
팬데믹은 말 그대로 모든 나라, 모든 사람이 피해를 볼 수 있는 인류 전체의 문제이다. 어느 한 나라의 유행이 끝나더라도 끝이 아니라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촘촘하게 연결된 경제는 말할 것도 없지만, 방역 또한 각 나라 자체 체제가 아닌 ‘팬데믹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 국내 유행을 성공적으로 관리했다는 대만, 뉴질랜드, 베트남 같은 곳이 지금 자유로운가?
한국처럼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팬데믹 상황에 더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다. 언제부터 여행할 수 있는지 관광은 언제 회복할지 등도 중요하지만, 멀리 떨어져 이름도 잘 모르는 그 많은 나라의 소비, 생산, 소득, 일자리, 건강 등이 이 땅 곳곳 수많은 사람의 일자리, 소득, 매출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세계적으로 경제와 방역을 긴밀하게 협력해야 하는 것이 실용적, 현실적 이유라면, 국가 간 불평등 문제는 인류가 당면한 도덕적 문제이기도 하다.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은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엄청난 백신 불평등을 말하면서 “재앙 수준의 도덕적 실패(catastrophic moral failure)”가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관련 기사 바로가기).
사무총장이 발신한 SNS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으니, 국제기구나 남의 나라 일로만 치부하기 어렵다. “모든 나라가 의료인과 노인을 먼저 접종하겠다는 것은 올바른 방침이다. 하지만 가난한 나라의 의료인과 노인보다 부유한 나라의 젊고 건강한 사람에게 먼저 접종하는 것은 옳지 않다.”(관련 기사 바로가기, 아래 그림 참조)
한국은 당연히 이들이 말하는 ‘부유한’ 나라에 속한다. 여름에 영국서 열린다는 G7 정상회의에 초청을 받을 정도니 더는 약소국이라 할 수 없는 나라가 아닌가. 실용이든 도덕이든, 숱한 사람들이 거론하는 그 국제적 역할과 책임에서 면제될 수 없는 것이 세계적 상식이다.
어느 나라든 국내 정치가 국제를 압도하는 현상, 그 냉정한 ‘현실론’을 우리도 모르지 않는다. 한국 국내 정치만 해도 그렇다. 백신 확보를 둘러싸고 현 정부를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정도는 약과다. 정치인 개인의 성공이나 실패 또는 보궐선거 전략까지 동원되는 형편이 아닌가.
‘국익’에 직접 봉사하지 못하면 국제협력이니 원조나 지원이니 하는 말조차 꺼내기 힘들 것이다. 국내 상황이 여유가 없는데 무슨 국제를 운운하는가 하는 비판, 또는 우리보다 형편이 나은 나라도 가만히 있는데 뭘 나설 필요가 있느냐는 비교론까지, 어느 한 가지인들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현실론은 한 가지 고려사항일 뿐이며 절대적 조건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정치는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단 한걸음, 반걸음이라도 그 현실의 경계를 넘을 책임을 지고 능력을 발휘하는 사회적 실천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 전체가 같이해야 할 몇 가지 과제를 짚는다.
첫째,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기존 메커니즘을 통해 더 많은 재정을 기여하는 것이다. 코백스나 세계보건기구가 그런 틀이지만, 그동안 작동해 온 원조와 국제협력의 방법을 새롭게,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노파심에서 한 마디. 국익과 산업, 경제적 이해관계를 지원과 국제협력으로 모호하게 숨기면 곤란하다. 팬데믹 대응을 영리화하지 말라. 예를 들면, 이른바 ‘K-방역’을 수출한다는 패러다임을 버리지 않으면 경제적 이익조차 얻기 어려울 것이다.
둘째, 코로나19 대응을 국제화해야 하며 백신 공급이 중요한 계기이자 전략이 될 수 있다. 노르웨이는 자국민 접종을 진행하는 것과 동시에 저소득국가의 백신 접종을 지원하기로 했고(관련 기사 바로가기), 캐나다도 남는 백신을 저소득국가에 기부하는 논의를 진행하는 중이다(관련 기사 바로가기).
우리는 왜 할 수 없는가?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물론이고 ‘신남방정책’ 또는 ‘역내 포괄적 경제 동반자 협정(RCEP)’에 해당하는 나라들과 협력할 수 있다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고위 경제관료가 했다는 표현, ‘가보지 않은 길’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셋째, 국제 논의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어떤 논의인지는 명확하다. 팬데믹 대응을 위한 국제협력은 어떠해야 하고 국제기구와 각 나라의 역할은? 국가와 정부 수준에서 충분히 준비하고 사회적 토대까지 갖추어야 우리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도 관점을 세계와 국제로 넓혀야 한다. 지금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세계보건기구 148차 집행이사회가 한창이다(1월 26일까지). 팬데믹 대응이 핵심을 차지하는 것은 불문가지. 한국도 집행이사국으로 이 회의에 참석할 텐데, 정부 차원에서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지 잘 모르겠다.
대통령이 참석할 예정이라는 오는 여름의 G7 정상회담도 또 다른 기회라 할 것이다. 이 회의는 내로라하는 국가들이 모여 코로나19 이후 국제 공조의 틀을 재구축하는 방안을 논의한다(관련 자료 바로가기). 참석이 의미가 있으려면, 좀 더 안전하고 건강한 인류 모두의 삶을 위해 한국이 할 수 있는 제안을 미리 준비해야 할 것이다.
청와대와 정부만의 일이 아니다. 보통은 G7 정상회의와 함께 시민과 시민사회의 관심을 반영하는 ‘C7’ 행사가 열린다(관련 자료 바로가기). 시민의 의견을 직접 반영할 수 있는 통로인 동시에 각국 정부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이다. 우리 또한 국경을 넘어 세계 시민의 역할을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