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지난 9일 전국의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 ‘대선유권자네트워크’를 출범시켰다. 이들은 “불평등 해소”가 2022년 대선의 화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기사 바로가기). 그만큼 불평등은 이제 간과하기 어려운 사회적 의제가 되었다. 불평등은 산술적이고 기계적인 차이를 뜻하는 게 아니라 부당하고 공정하지 못한 격차를 의미한다. 따라서 불평등은 곧 부정의(injustice)의 문제다.
흔히 소득(자산)불평등이 많이 거론되지만, 우리 사회에는 젠더, 인종, 장애, 지역 등 특정 요인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한 유형의 불평등이 존재한다. 건강불평등 역시 ‘실재’하는 사회적 불평등의 한 현상이다. 무수한 사회적 요인들에 따라 집단의 건강수준이 달라진다고 하는, 건강의 ‘사회성’은 수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각 불평등은 서로 긴밀히 얽혀있으면서도 저마다 고유한 개념적 내포와 외연을 가진다. 특히 건강불평등은 불평등의 대상이 ‘몸(마음)’이라는 점에서 여타 불평등과 구별되는 특성과 위상을 가진다. 각종 사회적 불평등의 부정적 ‘힘’들이 다양한 경로와 기제를 통해 우리 몸에 발현된 결과물이 바로 건강불평등이다. 이런 점에서 건강불평등은 사회적 불평등을 포괄하는 ‘메타-불평등’이자 사회 부정의를 가늠하는 바로미터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건강불평등에 대한 대중적 인식과 관심은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다른 불평등에 비해 사회적 의제로서의 우선순위도 높지 않은 편이다. 왜 건강불평등은 사람들에게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일까? 아마도 건강에 대한 뿌리깊은 개인주의적 경향성을 주 원인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건강은 스스로 관리하고 책임져야 할 문제라고 하는 문화적 신념을 추종할 때 건강불평등은 허황된 모순적 개념으로 비춰질 뿐이다.
이와 함께 불평등에 대한 이해관계가 서로 같지 않다는 사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불평등은 상대적 개념이다. 즉, 불평등이 우리 모두를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불평등 구조의 피해자가 있다면 수혜자도 있기 마련이다. 이 구조로부터 별다른 피해를 겪지 않는 이들이라면 문제해결에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갖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과연 이들은 건강불평등 문제와 무관할까? 우리 모두는 사회적 존재로서 건강불평등 구조가 형성되고 유지되는 데 어떤 형태로든 관련되어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의도성 여부와 상관없이 말이다. 특히 권력관계의 우위에 있는 수혜자 집단이라면 더 큰 ‘역할’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최근 이러한 생각에 기초하여 건강불평등을 양산하는 기득권층의 역할이 연구에서 과소반영되고 있는 문제를 비판하는 다소 도발적인 연구 한 편이 발표되었다(☞논문 바로가기: 관심 전환: 기득권층에 대한 연구의 과소반영이 어떻게 건강불평등에 대한 설명을 불완전한 상태로 남겨놓는가).
연구진은 지난 수십년간 연구와 정책적 개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불평등 문제가 완고하게 지속되고 있는 사실로부터 기존 접근방식이 어떤 것을 놓치고 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리고 그 후보 요소로서 인종과 사회경제적 위계질서의 우위에 있는 사람들의 건강불평등 생산 활동이 간과되어 온 측면을 고려할 필요성을 제시한다.
만약 이러한 기득권층의 활동이 주된 관심에서 멀어져 있다면 건강불평등을 만드는 원천들에 대한 이해가 불완전해질 수밖에 없고, 문제해결을 위한 개입의 방향도 잘못 설정될 위험이 있으며, 따라서 그 결과 건강불평등이 영속화될 위험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건강불평등을 양산하는 데 기여하는 권력집단의 활동이 연구 과정에서 소홀히 다뤄지거나 과소평가되는 현상을 ‘건강불평등의 관심전환(관심돌리기)’으로 명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전환’은 피해집단의 상황에만 초점을 맞추고 해결책을 찾도록 이끌면서 기득권층의 건강불평등 생산활동에 대한 책임을 면제해준다고 말한다.
연구진은 이러한 ‘관심돌리기’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장소의 힘: 두 명의 12살 소녀 이야기”(☞바로가기)라는 예화를 소개한다. 요지는 간단하다. 주거공간의 차별적 영향으로 인해 부유한 동네에 사는 소녀가 가난한 동네에 사는 이웃소녀보다 6년 더 오래 살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된다는 내용이다. 다만 연구진은 이 이야기에서 가난한 동네의 열악한 주거환경에 대한 부정적 묘사가 상대적으로 더 길고 상세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해진다. 그것은 가난한 동네의 사회적 조건들이다. 반면 부유한 동네에서는 문제될 만한 게 없으며 두 소녀의 기대수명의 격차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어떤 중요성도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연구진은 부유한 동네가 가진 중요한 상황에 대한 묘사가 누락되어 있을 가능성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은 가상적 상황을 고려할 것을 제안한다.
부유한 동네 소녀의 할아버지는 2차 대전 참전군인으로 제대군인 원호법에 의해 각종 혜택을 받았는데, 이는 흑인과 유색인종은 누리지 못한 것이었다. 이 혜택 덕분에 그는 상당한 자산을 소녀의 부모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었고, 소녀의 아버지는 기부입학으로 명문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소녀의 부모는 소득세를 아끼기 위해 세금변호사를 고용한다. 또 가난한 동네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여성을 가정부로 고용하여 최저임금을 주면서 자신들이 일하는 동안 집을 청소하며 딸을 돌보도록 하였다. 부유한 소녀는 가정교사 덕분에 명문학교 입학시험에서 다른 아이들보다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 가족은 지역 최고 병원에 기부금을 낸 덕분에 자신들이 필요할 때 쉽게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연구진은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건강에 유리한 상황을 획득해 나가는 실천들이 과연 건강불평등과 무관할 수 있는지 질문한다. 이어서 연구진은 이러한 건강불평등의 ‘관심전환’ 현상을 확인하기 위해 그동안 연구 과정의 핵심 단계들에서 기득권층의 행동이 충분히 고려되었는지 여부를 탐색하였다. 구체적으로, (1) 건강불평등을 양산하는 기득권층의 활동을 직접적으로 고려하고 있는지, (2) 피해집단의 진술에 의해 간접적으로 보고되는 기득권층의 행동을 고려하고 있는지, (3) 피해집단의 문제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수집된 자료를 검토하였다.
첫 번째 연구단계로 지난 2015~2019년 동안 미국 국립보건원의 연구보조금을 받아 추진된 건강불평등 관련 연구들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총 349개의 연구 가운데 기득권층의 불평등 양산 행동에 직접적으로 초점을 맞춘 연구는 없었다. 또한, 기득권층으로부터 학대, 착취, 억압, 차별을 받은 피해집단의 보고를 다룬 연구 역시 없었다. 반면 247개(70.8%)의 연구가 피해집단의 건강행동(흡연, 식이, 운동)과 특성(인지능력, 건강문해력), 바이오마커, 유전 요인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두 번째 연구단계로 주요 건강관련 조사자료원들을 검토하였다. 검토결과, 기득권층의 건강불평등 생산활동에 초점을 맞춘 조사문항이나 측정지표는 없었다. 인종차별이나 암묵적 편견 등을 다룬 조사는 아예 없거나 관련문항이 드물었고, 사회경제적 지위를 고려한 조사자료원은 전무하였다. 반면 상당수 조사가 개인의 건강행동과 특성, 바이오마커, 유전 요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세 번째 연구단계로 2014~2019년 동안 건강불평등을 다루는 3개의 주요 학술지에서 출판된 경험적 연구들을 검토하였다. 총 324개 문헌 가운데 오직 7개(2.2%)만이 건강불평등을 양산하는 기득권층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16개(4.9%)의 연구만이 차별과 관련된 지표를 포함하였는데, 대부분 인종차별에 관한 것이었다. 단 2개의 연구(0.6%)만이 사회경제적 지위에 기초한 차별을 포함하였다. 반면 피해집단의 특성과 조건을 다룬 연구는 62.3%에 해당하였다.
마지막으로, 미국에서 10년 단위로 향후 건강목표를 제시하는 ‘Healthy People 2000, 2010, 2020, 2030’에 담긴 정책권고안을 검토하였다. 예상대로 이 문서들에는 주로 소수자 집단과 빈곤층을 대상으로 한 건강생활습관 촉진과 가정방문 프로그램, 인플루엔자 백신 캠페인 등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상의 검토결과는 연구진이 제안한 ‘건강불평등의 관심전환’ 개념을 지지하는 근거로 볼 수 있다. 연구진은 이러한 ‘관심전환’이 나타나게 되는 몇 가지 이유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무엇보다 기득권층의 건강불평등 생산 활동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혜택을 누리고 있는 이들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구의 각 단계에서 어떤 이슈에 초점을 맞출지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기득권층이 이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또한, 기존 특혜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기득권층이 불공정하고 비윤리적이라는 도전에 부딪히게 되면 기존 특혜를 편안히 누리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러한 설명들은 기득권층들로부터 강력한 저항에 부딪힐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어떤 개별 연구자라도 자신의 연구를 평가하고 후원하고 유포시켜주는 기득권층의 입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연구에 대해 어떤 이들은 부유층에 대한 적대감을 조장하면서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는 정파적 연구라고 혹평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연구의 주저자인 브루스 링크는 오랫동안 인종과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른 사회적 차별과 낙인이 건강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연구해 온 세계적 석학이다. 건강불평등 문제해결을 위한 논의와 개입이 피해자 측면으로 귀결되는 현실을 반복해서 목도한 저자가 사회와 학계를 향해 던진 질문으로 이 연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러한 맥락을 고려하더라도 이 연구의 주장에 논쟁적 소지가 없는 건 아니다. 수혜집단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기득권층이라고 모두 건강불평등을 생산하는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또 반대로 이주민과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을 차별, 착취, 억압하는 사례와 같이 명백한 활동이 없다면 문제가 없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필자가 생각할 때 이 연구의 가치는 문제의 원인을 애써 외면하면서 문제 해결을 추구하고 있는 모순적 현실을 폭로하는 데 있다. 그리고 건강불평등 구조로부터 누가 이득을 얻고 누가 피해를 입는지 집요하게 상기시키면서, 지금 나의 선택과 행동(또는 비행동)이 누군가를 차별하고 아프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지 않은지 성찰하도록 이끈다는 점이다. 즉, 이 연구는 건강불평등 구조에 속해 있는 우리 모두에게 ‘사회적 책임’을 묻고 있다.
이 점에서 볼 때 우리에게는 어떤 새로운 차원의 윤리적 접근이 필요할지 모른다. 책임을 묻는 것은 실천, 곧 윤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지배 속에서 불평등에 대한 지식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경제적 합리성과 이기심으로 무장한 채 각자도생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불평등 문제를 돌아볼 여력과 의지가 부족하다.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사회적 감각이 무뎌진 이들에게 자신과 직접 이해관계가 없는 건강불평등 문제는 사실상 무의미한 기표일 뿐이다.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여 건강불평등이 결국 우리 모두의 책임임을 자각하기 위해서라도 관계적 주체로서의 ‘사회성(공동체성)’의 윤리 강화를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 서지 정보
– Bruce G. Link & San J. García. 2021. Diversions: How the Underrepresentation of Research on Advantaged Groups Leaves Explanations for Health Inequalities Incomplete, Journal of Health and Social Behavior, 62(3): 334~349. https://doi.org/10.1177/00221465211028152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매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