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플 때 흔히 듣게 되는 “충분히 푹 쉬면서, 밥 잘 챙겨 먹으라”는 인사. 때로는 의사의 진단이기도 한 이 말이 나오는 순간, 말한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쉴 수 있을까? 출근은? 쌓인 집안일은? 마감 일정은? 당장 생활비는? 차마 꺼내지 못하는 많은 말들이 허공에 맴돈다. 작년 7월 한국 사회는 아프면 쉬면서 충분히 건강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상병수당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서로에게 건네는 아프면 쉬라는 이 한마디는 지금도 여전히 무색하다.
우리는 작년 상병수당 시범사업 시작에 앞서, 코로나19를 계기로 드디어 도입되는 이 제도가 “‘뉴노멀’ 건강보장 체계의 시작”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일단 시작하고 보자는 현실정치”를 넘자고 제안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정치와 제도의 경로의존성”에서 벗어나자는 말도 덧붙였다(논평 바로가기).
이미 도입된 다른 제도가 그랬듯 상병수당도 기존 경로와 현실정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 1단계 시범사업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병수당의 협소한 보장 범위가 대표적이다. 월급이 이백만원이나, 삼백만원이나, 사백만원이나 관계없이 모두에게 110만원을 보장한다(최저임금의 60%). 아픈 첫날부터가 아니라 못해도 3일은 돈 없이 버텨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2주는 무급으로 버텨야 한다. 4개월 이상 일을 쉬어야 할 큰 병이면 이마저도 지급이 중단된다.
지난 1년간 시행된 상병수당 1단계 시범사업은 한계만이 아니라, 새로운 건강체제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도 함께 보여줬다. 가령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을 포함하는 건강보장 체제의 가능성, 건강과 안전의 단위로서 개인이 아닌 공동체로의 전환 가능성, 아프면 쉬면서 충분히 건강을 회복하자는, 건강을 둘러싼 새로운 가치·규범·윤리·행태의 가능성 등등.
상병수당 시범사업은 또한 다변화·분절화·파편화되어가는 노동에 대한 가능성도 그린다. 제도가 인정하는 ‘일하는 사람’ 정의의 확장 가능성! 국민건강보험을 제외하면 표준 고용관계를 벗어난 노동과 시민을 넉넉히 품는 사회보장제도는 없는 상황에서 여전히 부족하지만, 형식적으로나마 상병수당 1단계 시범사업은 “전체 취업자”를 대상자로 호명했다. 기본 자격을 15세 이상 65세 미만의 대한민국 국적자로 한정하므로 연령과 국적 등에 따른 자격의 구획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기존 제도가 배제하던 이들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점은 특히 건강형평성 차원에서 큰 진전이다. 1단계 시범사업에서 상병수당을 지급 받은 사람들 중에는 자영업자도(18.1%) 있고, 건강보험 지역가입자 중 고용·산재보험 가입자도(9.7%) 있으며, 일부 특수고용 노동자도 포함된다. 신청자 가운데 70.2%가 소득 하위 50%였고, 58.2%가 50인 미만 사업장에 종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보도자료 바로가기).
하지만 오늘 시작하는 2단계 시범사업은 그나마의 가능성도 없애버린 듯하다. ‘모든 노동자’는 이제 ‘소득 하위 50% 취업자’로 축소됐다. 투쟁으로 쟁취하지 못한 권리이니, 묵묵히 받아들여야 하는가? 상병수당 시범사업은 그 시작부터 노동자와 시민이 아닌 정부와 전문가들이 대상자 범위, 금액, 기간을 정했다. 아픈 노동자들의 몸을 정부와 전문가들의 편의에 따라 평가하고, 판단하며, 종종 아프지 않다고 결정해 버렸다. 이 모든 과정에 존엄과 권리가 보이지 않는다. 아픈 노동자는 이 험난한 과정을 뚫고 동료 노동자들의 시선을 버티며, 해고의 불안을 끌어안고 나서야 비로소 상병수당 제도에 가 닿을 수 있다. 그야말로 ‘한국형’ 상병수당이다.
이렇듯 정당성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새로운 건강과 노동 체제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한국형 상병수당 제도는 비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의 결과물이다. 상병수당의 주체인 노동자와 시민은 도대체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과정을 통해 지금과 같은 형태의 상병수당 제도가 만들어졌는지 알 길이 없다. 현재 제도 자문 거버넌스에서 노동자의 자리는 구색 갖추기일 뿐, 다양한 필요가 반영되기 어려운 구조다.
정부는 상병수당 논의 과정에 관료와 전문가뿐 아니라 노동자와 시민의 참여를 반드시 보장해야 한다. 이들의 참여는 정부의 오랜 과제인 ‘제도 연계’를 실현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출근했더라도 피곤하거나 힘들 때 휴게실에서 충분히 쉬고, 심각한 건강 문제를 경험하지 않도록 사전에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등 아프면 쉬기 위한 필요는 상병수당을 포함해 여러 다른 제도를 넘나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프면 쉬면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제도의 경계를 허무는 일 역시 노동자와 시민의 삶을 중심에 둘 때만 가능하다.
노동자와 시민 역시 아프면 쉴 권리 보장을 위해 연대하여 투쟁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투쟁 없는 권리 보장의 역사는 없다. 투쟁을 통해 확보한 단체협약상 병가제도 역시 그렇다. 하지만 이를 적용받는 이들은 여전히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제도의 전 과정에 참여와 쉴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연대는 이 균열의 공간에서도 피어나야 한다.
한국형 상병수당 시범사업은 2025년 6월까지로 계획되어 있다. 본사업까지 2년이 더 남았고, 길게 보면 세기를 넘어 이어갈 제도이니 아직 늦지 않았다는 뜻이다. 정부는 아프면 쉬라는 말이 더 이상 무색해지지 않도록 지금부터라도 노동자와 시민과 함께 ‘사람중심’ 상병수당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