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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검진 너머의 ‘건강 체계’를 실현하지 못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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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기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한국은 건강검진의 나라다. 몸에 무언가 이상을 느끼거나 의료 서비스를 받아야겠다는 필요가 있을 때 우리는 병원으로 가 각종 피검사와 영상 검사, 내시경 검사를 받는다. 검사 결과 이상이라도 있으면 곧장 전문의를 만나 치료를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안심인가.

 

이처럼 건강검진이 우리의 건강을 돌보는 주치의 노릇을 대신해 준다지만 정말로 안심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막연한 건강 문제 앞에서 우리는 종종 불안과 막막함을 경험한다. 돈으로 구매한 안심은 기껏해야 일회용. 건강을 돌보는 ‘체계’라는 게 있다면, 검사와 치료가 이 체계의 전부인 걸까?

 

오래전부터 세계보건기구는 지역사회 중심의 ‘일차보건의료’를 강조해왔다. 일차보건의료는 좁게는 건강 필요가 있을 때 가장 먼저 의료인을 만나서 받게 되는 상담, 교육, 진단, 치료 서비스를 뜻한다. 하지만 건강이 노동이나 주거, 지역사회 환경 등 사회적인 요인과도 관계되므로, 온전한 의미의 일차보건의료는 의료를 넘어 다양한 서비스를 포함하고, 지역사회에 개입하며, 예방과 건강 증진을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그간 포괄적 의미의 일차보건의료를 구현하려는 노력이 없지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맹아조차 불분명한 상황이다. 따라서 건강검진을 넘어선 일차보건의료 체계를 상상하고자 한다면 다른 나라의 경험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 호주는 고소득국가 중에는 비교적 적극적으로 일차보건의료를 위한 노력을 해왔지만 부침을 겪고 있는 국가다. 오늘 소개하는 연구는 호주에서 포괄적인 지역사회 건강 체계를 실현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인을 파악하고자 한 논문이다. (☞논문 바로가기: 지역사회 보건 체계가 고소득국가에서 자리매김하지 못한 이유: 호주의 경험)

 

호주의 일차보건의료는 두 갈래로 발전해왔다. 하나는 건강에 대한 생의학적 관점에 기초한 것으로서 민간 일반의가 제공하는 행위별 수가 기반의 서비스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 관점에 기초하여 지역사회 건강 체계를 구현하려는 것으로서 다학제적 서비스를 기반으로 하며, 지역사회 개발에 참여하고,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에 개입하며, 지역이 스스로 통제하고 관리하는 일차보건의료다. 전자는 ‘선택적 일차보건의료’, 후자는 ‘포괄적 일차보건의료’라고 지칭할 수 있다.

 

1980년대 이후로 호주의 건강 체계는 선택적 일차보건의료로 무게추를 옮겨왔다. 하지만 포괄적 일차보건의료는 일부 지역에서 지속되고 있으며, 특히 ‘원주민 지역사회가 통제하는 건강 서비스(ACCHS)’는 여전히 모범적인 사례로 남아있다. ACCHS 등에서 나타나는 호주의 포괄적 일차보건의료의 강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접근성과 형평성에 초점을 두고 원주민, 낙오지 주민, 저소득층 등 도움과 지원이 필요한 곳에 설립된다. 둘째, 지역사회 대표가 이사회에 참여해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며, 지역 주민의 역량을 개발하고 서비스 제공에 참여하게 한다. 셋째, 다양한 서비스 제공 인력들이 수평적 구조의 팀을 이루며, 공동 예약, 사례 회의, 팀 기획 등 총체적이고 조화로운 돌봄을 위한 전략을 실행한다. 넷째, 개별적인 치료 서비스를 넘어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을 다루기 위해 직업 훈련, 가정폭력 대응 네트워크 등과 연계한다.

 

연구진은 호주에서 포괄적 일차보건의료가 쇠퇴하는 상황을 배경으로 지역사회 건강 체계의 장애물을 식별하기 위해 연구를 수행했다. 호주 일차보건의료에 관한 두 개의 다른 연구에서 모은 이차자료를 활용했으며, 이념(ideas), 이해관계(interests), 제도(institutions)를 분석을 위한 이론적 틀로 삼았다.

 

연구 결과 첫째, 이념의 차원에서 건강에 대한 의료적 관점이 사회적 관점을 압도하고 있었다. 지역사회의 실무자들은 건강의 사회적 측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지만, 호주 정부는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을 우선순위 밖으로 밀어냈다. 그러면서 교통 지원이나 보육 서비스, 지역사회 방문 서비스가 축소되고 접근성이 감소했다. 지역사회 서비스를 없애고 이를 대체하여 만성질환자 치료 센터를 건립하기도 했다.

 

둘째, 이해관계의 차원에서 의료 전문가의 이익이 지역사회의 이익보다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일반의 대부분은 행위별 수가로 보상받는 개인 진료에 종사하고 있었으므로, 선별적 일차보건의료는 의사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지역사회가 참여하는 운영위원회가 사라지면서 전문가 권력은 더 강해졌으며, 일차보건의료 네트워크 이사회에 지역사회 대표가 포함되는 경우는 드물었고 지역사회 자문단의 권한은 미약했다. 그러면서 지역사회 식사 제공 서비스가 축소되고 주민 참여의 기제였던 건강 캠프는 중단되고 말았다.

 

셋째, 제도의 차원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의 일환인 관리주의와 예산 긴축은 지역사회 건강 체계를 저해했다. 단기적인 중간 산출물을 핵심 성과 지표로 설정하면서 숫자로 평가하기 어려운 부문 간 협력이나 지역사회 역량 강화는 점차 소외되었다. 신자유주의적 평가, 관리 체계는 서비스의 초점이 지역사회에서 급성기 치료로 옮겨가는 데 일조했다. 시장 참여의 원칙에 따라 민간 건강보험사가 지역 일차보건의료 거버넌스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연구진은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경제 모형이 공동체를 위한 재분배 목표를 추구하는 지역사회 건강 체계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영리를 추구하는 민간 주체 위주의 공급자 분포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포괄적 일차보건의료에 기반한 지역사회 건강 체계를 이루려면 지역사회에 뿌리를 둔 사회운동이 정치적 힘을 발휘하여 이념과 이해관계, 제도의 기존 지형을 뒤흔들어야 한다는 것이 연구진의 제언이다.

 

연구의 결론에 비추어 생각하면 보건의료가 상품으로 자리 잡은 한국에서 포괄적인 지역사회 건강 체계는 요원해 보이기만 한다. 하지만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인민이 겪는 불안과 고통을 생각하자. 값비싼 첨단 의료가 우리의 건강을 돌보아줄 것이라는 환상은 영원히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체계 아닌 체계를 거부하고 진정한 건강 돌봄 체계를 상상해야 할 때다.

 

 

*서지 정보

Baum, F., & Freeman, T. (2022). Why Community Health Systems Have Not Flourished in High Income Countries: What the Australian Experience Tells Us. International Journal of Health Policy and Management, 11(Special Issue on CHS-Connect), 49~58.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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