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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과 함께 잘 살아간다는 것: 아픈 몸들의 번영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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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기(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사라는 딸과 함께 임시 거주지에 사는 젊은 여성이다. 그녀가 사는 원룸은 침대가 공간 대부분을 차지하는 비좁은 곳이다. 밤마다 만성적인 허리 통증이 그녀를 괴롭힌다. 우울증과 불안장애는 10년이 넘도록 그녀와 함께했다. 사라는 원래 사무직에 종사했지만, 건강이 점점 나빠져 지금은 실직 상태다. 그녀는 침대에서 하루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다.

 

사라의 이야기는 영국 런던에서 복합질환을 지닌 아픈 몸들의 경험을 탐구한 논문에 나온다(☞논문 바로가기: 만성 위기로서 복합질환: 런던의 사회적 취약지역에서 다수의 장기 질환을 지니고 산다는 것). 복합질환은 두 가지 이상의 장기적인 건강 문제가 겹쳐있는 상태를 뜻한다. 어떤 사람들은 복합질환을 고령화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여기지만, 논문의 저자들은 이런 손쉬운 설명에 반대한다. 젊은 층의 복합질환 유병률이 높아졌다는 것이 한 가지 반증이다.

 

어쩌면 생물학적이고 의학적인 설명 자체가 문제를 키우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열악한 주거지와 불안정한 고용이 사라의 복합질환과 깊게 관계한다는 사실을. 그녀가 청소년기 성적 학대의 피해자였고, 결혼한 뒤에는 배우자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쳐야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우울증은 정신과에서, 허리 통증은 정형외과에서 치료받으면 된다는 말은 사라에게 어떤 의미일까? 정리되지 않은 약상자는 가득 찬 지 오래다.

 

사라는 영국 런던에 살고 있지만, 한국에 사는 누구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개한 논문은 아픈 몸들이 잘 지낼 수 있도록 정말로 돕기 위하여 이들의 경험에서 출발하자고 제안한다. 생생한 삶의 이야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저자들은 11명의 참여자를 면담하고 가정과 병원, 생활터로 찾아가 관찰했다. 참여자들은 워크샵에서 함께 일상의 사진을 공유하고, 맥락을 설명하고, 공통된 주제를 스스로 도출했다. 논문은 삶의 서사를 그대로 서술하며 복합질환 경험의 여러 측면을 보여준다.

 

다시 사라에게 돌아가 보자. 10대에 처음 항우울제를 처방받은 이후로 사라가 복용하는 약제 수는 급격히 증가했다. 그녀는 정신과 약과 여러 종류의 중독성 진통제를 병용하고 있다. 너저분한 약상자야말로 삶과 건강에 관한 그녀의 느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약물의 부작용을 다른 약물로 덮는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 “꼼짝없이 갇힌 신세다”, “평생 벗어날 수 없다.”

 

사라는 잘 지내기 위해 주치의에게 상담 치료를 받고 싶다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녀의 임시 거주지 상태가 장애물이었다. 요청은 거부당했다. 마치 안정된 조건을 갖춘 사람만 삶의 안정을 위한 상담을 받을 수 있다는 것처럼. 사라는 한편으로 약물에 지쳤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약물에 희망을 건다. 그녀는 주치의에게 하루빨리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진단과 처방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종용한다.

 

살리마는 또 다른 젊은 여성이다. 그녀는 방글라데시계 영국인으로 남편과 네 아이와 함께 지낸다. 살리마는 오랜 편두통과 우울증, 강박장애, 불안장애로 고통받고 있다. 그녀의 거주지도 사라의 경우처럼 비좁은 임시 주택이다. 살리마는 네 아이를 돌보는 일에 더해 벽에 핀 곰팡이를 닦아내고, 벌레를 차단하기 위해 틈새를 막고, 쥐가 꼬이지 않게 음식을 처리해야 한다. 살리마는 약을 잘 먹지 않는다. 생활 환경이 자기 질병의 근본 이유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살리마는 원래 병원에서 행정 업무를 했다. 일터는 젊은 엄마에게 숨 쉴 틈과 같았다. 하지만 병원은 임신과 질병으로 뒤처지는 노동자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살리마는 해고당했고, 새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제2의 성』을 쓴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말을 빌리면 살리마는 단지 생명 유지를 위한 활동만을 반복하는 ‘내재성’의 상황에 갇히게 되었다. 살리마가 자유를 향해 ‘초월’할 수 있으려면 어떡해야 할까? 남편의 보살핌은 일상을 견딜 힘을 주었고, 이슬람 신앙은 질병과 함께하는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살리마의 이야기는 개인적이고 생물학적인 질병 관리를 넘어 무엇이 아픈 몸들에게 필요한지 힌트를 준다.

 

세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이샤 역시 젊은 방글라데시계 영국인 여성이다. 그녀는 당뇨병과 함께 우울증과 섭식 장애를 앓는다. 아이샤의 오빠는 중증 자폐증이 있었고, 그녀의 가족은 오빠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아이샤는 10살 무렵부터 오빠를 보살펴야 했다. 주변이 시끄러우면 오빠는 불안해했고, 감정을 어린 아이샤에게 표출했다.

 

아이샤가 14살일 때 오빠가 시설에 입소하면서 아이샤의 폭식이 시작했다. 음식은 굴레였다. 음식에 집착하다가 음식을 제한했고, 제한은 다시 집착으로 이어졌다. 체중은 점점 불어나 아이샤는 고작 17세에 제2형 당뇨병을 진단받았다. 아이샤에게 진단은 혼란과 불확실성의 종결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울면서 상담을 요청한 아이샤에게 주치의는 항우울제를 함께 처방했다.

 

아이샤는 질병을 관리하고자 노력했다. 매일 산책을 했고, 몸이 안 좋은 날엔 손가락을 찔러 혈당을 쟀으며, 건강한 식단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건강관리를 위한 노력은 자주 강박과 좌절로 이어졌다. 음식이 굴레였던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건강에 관한 걱정을 묻어두고 디자인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에 진학했을 때 아이샤의 삶은 활기를 찾았다. 진단 이전으로 돌아가는 일 말고 다른 의미 있는 일을 찾으면서 삶의 ‘내재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세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논문은 아픈 몸들에게 필요한 의료(healthcare)가 무엇인지 묻는다. 복합질환이 생애 전반의 곤란함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면, 낫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매우 더디다면, 사회의 질서가 아픈 몸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려 든다면, 개별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조직되는 현대 의료가 이들을 제대로 도울 수 있을까? 오히려 사람들이 삶에서 경험하는 것과 의료가 추구하는 것의 불일치가 아픈 몸을 더 아프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많은 아픈 몸에게 완치는 기적이고, 현실에 없는 것이다. 논문은 이들에게 완치가 아니라 ‘번영(flourishing)’을 말하는 건강 돌봄(health care)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번영은 적절한 조건이 채워질 때 잠재력이 온전히 실현되는 것이다. 봄이 오면 개나리도, 민들레도, 벚꽃도 각자의 모양대로 만개하는 것이다. 삶에 내재하는 취약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질병과 함께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당사자의 경험으로부터 다시 정의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병원을 벗어나 건강 돌봄을 재조직하려는 변화가 있는 것 같아 반갑다. 2018년부터 ‘지역사회 통합돌봄 선도사업’을, 2023년부터 ‘노인 의료‧돌봄 통합지원 시범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정책들이 어떤 상징으로나 합리적 계산으로만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정말로 아픈 몸들이 잘 살도록 돕고 싶다면 사업을 새로 벌이는 수준을 넘어 의료와 돌봄이 무엇인지 다시 정의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이 새로운 정의는 단일 질병이 아니라 사람의 총체적 삶을 중심에 둔 것이어야 한다. 측정하기 이전에 대화하고, 처방하기 이전에 경청하는 무언가여야 한다. 아픈 몸도 번영할 수 있도록.

 

 

*서지 정보

van Blarikom, E., Fudge, N., & Swinglehurst, D. (2023). Multimorbidity as chronic crisis: ‘Living on’ with multiple long-term health conditions in a socially disadvantaged London borough.  Sociology of Health & Illness, 1–19.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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