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전쯤 ‘전국 도시 쇠퇴 현황’이란 자료가 보도되었다. 국토교통부가 작성했는데, 예상대로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언론의 보도가 딱 그렇다. 연합통신을 제외하면 이른바 ‘전국지’로 불리는 신문들은 한두 군데를 빼고는 간단한 소식으로도 다루지 않았다.
‘지방지’만 요란했을 뿐이다. 실린 기사 내용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우리 도는 몇 군데나 쇠퇴 지역으로 분류되었다, 전국에서 제일 많다, 더 늘어났다 등 심각한 표현이 꼬리를 물었다.
기준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쇠퇴 지역’으로 분류된 곳은 인구 감소, 주거환경 악화, 산업 쇠퇴 등 세 가지 요건 가운데에 두 가지 이상에 해당하는 지역을 말한다. 좀 더 현실감 있게 설명하면 이렇다.
인구 감소는 지난 30년간 최대치에 비해 현재 인구가 20퍼센트 이상 줄었거나 지난 5년간 3년 연속 인구가 줄어든 곳이다. 산업 쇠퇴도 비슷하다. 10년간 사업체가 최대치 대비 5퍼센트 이상 줄었거나 5년간 3년 연속 사업체가 줄었다는 것이 기준이다.
전남 20곳, 경북 18곳, 강원과 경남이 각각 11곳씩 쇠퇴 지역으로 분류되었다. 특히 전남은 15개 시군이 세 개 기준 모두를 충족하는 상태라고 한다. 경북도 9개 시군이 모든 기준을 맞추어 그저 조금 덜할 뿐이다.
같은 광역자치단체 안에서도 차이가 많이 난다. 경상남도가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창원, 김해, 양산, 거제 등 7개는 성장 도시로 분류되었지만, 서부 경남에서는 진주시만 쇠퇴 도시를 면했다.
마침 요즘 나왔으니 옮긴 것이다. 비수도권 도시들의 실상을 나타내는 지표는 한둘로 그치지 않는다. 수도권과 비수도권, 또는 중심 도시와 주변부로 나누어진 분리와 격차는 이제 심상할 정도다.
통계는 그나마 무미건조하기라도 하지만, 일상은 지역 불균형이나 격차라는 말로 다 삭이기 어렵다. 연합뉴스의 최근 보도를 보자. 산부인과가 없는 시군구가 전국적으로 58개에 이르고, 산부인과 전문의가 없는 시군구가 14곳이나 된다.
지난 12일 방영된 한국방송의 ‘바보병원-공공병원의 하루’에서도 공공병원과 주민의 고단함이 함께 드러났다. 한 공공병원이 경기 북부지역과 인근 강원도 지역에서 분만이 가능한 유일한 곳으로 소개되었다. 강원도의 산모사망률이 서울의 세 배가 넘는다는 사실이 저절로 떠오른다(이것이 유일한 이유라고 할 수는 없다).
응급의료도 마찬가지다. 급성 심근경색은 증상이 생긴 후 몇 시간 안에(응급실 도착 후는 90분 안에) 막힌 혈관을 뚫는 시술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의학적 지침이다. 그러나 강원도와 영남 내륙의 많은 지역이나 섬에서는 그걸 따질 형편이 아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시간에 의료기관에 도착할 방법이 없다.
지역간 불평등을 줄이고 비수도권과 취약 지역을 살리려는 논의는 해묵은 것이다. 전문가가 아니라도 지방 재정 확충과 수도권 규제 등 몇 가지 초점을 잘 안다. 이젠 다시 생소하게 되었지만, ‘국가균형발전특별법’과 ‘지역발전위원회’도 아직 존재한다.
때로 구색을 갖춘 갖가지 정책들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농어촌 취약지에 분만을 할 수 있는 시설을 늘리자는 것이 대표적이다. 보건복지부는 취약지역에 산부인과를 유치하기 위해 올해만 40억 원의 예산을 편성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시도가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은 드물다. 앞서 말한 쇠퇴 지역을 볼 때도 ‘균형 발전’은 공허한 꿈이거나 괜한 겉치레에 가깝다. 정책으로 쳐도 흐름을 바꿀 만큼 영향력이 큰 것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앞으로의 전망도 그리 밝지 못하다. 그동안 나왔던 균형 발전 방안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까도 의심스럽지만, 아예 목표 자체를 부정하는 목소리도 점점 더 커진다. 수도권 규제만 하더라도 더 이상 고집하는 것보다 시장 논리에 맡기는 편이 낫다는 목소리가 드높다.
지자체가 스스로 능력을 키워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공공기관 이전이나 수도권 규제 완화 논란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공기관이나 공장 유치에 사활을 걸 정도다. 이제 비수도권이 경제적으로 자생 능력을 갖기는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다.
재정 상황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 뻔하다. 세입 기반은 취약한 반면 쓸 데는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 무상보육 예산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은 시작일 뿐이다. 국고보조율과 지자체 부담을 다시 조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사정이 이렇다면, 과연 오래된 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좋은 지역 축제로 경제를 살리는 것, 국고 지원을 조금 늘리는 것, 이런 것들로 격차와 불평등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또는 12월부터 시행되는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무슨 새로운 계기가 될까.
솔직하게 말하면, 그 정도로 될까 싶다. 뭐라도 해보는 차원으로 보이지 영 미덥지 않다. 할 수만 있다면 새로운 틀에서 다시 접근하는 것이 맞겠다. 무슨 말이 적당한지 망설여지지만, ‘발본’이나 ‘급진’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지금까지 해 오던 지방 살리기의 기본 틀은 ‘경제 살리기’다. 지역 경제라는 말이 그렇고 활성화가 뜻하는 바도 마찬가지다. 쇠퇴와 재생의 논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경제 중심의 틀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새로운 것, 발본과 급진의 한 틀로 ‘발전에 대한 권리’를 말하고 싶다. 유엔은 이 권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사람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발전에 참여하고 기여할 권리, 그리고 그것을 누릴 권리를 가진다(1986년 유엔총회가 채택한 발전의 권리에 대한 선언 바로가기).
발전이 ‘권리’로 표현되는 것을 특히 주목해야 한다. 모든 인권은 그것이 인권인 한 자격과 관계없이 당연히 주장하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힘없는 쪽의 아쉬운 소리가 아님은 물론이지만, 권력이 마음대로 베푸는 선의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권리라면 책임 주체도 더 명확해진다. 특히 발전에 대한 권리가 집단적 권리라고 할 때, 국가가 권리를 보장할 일차적 주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더 나아가면, 책임의 내용, 그리고 그것을 배분하는 방법 역시 달라진다.
다른 사회권과 마찬가지로, 어느 수준까지 권리인가는 논쟁적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삶의 질이라는 관점에서 국가의 책임 수준이 사람마다 터무니없이 갈릴 것 같지는 않다. 어느 곳에서든 안전하게 애를 출산하고 응급 치료를 받을 권리를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권리의 목록과 수준은 사회적으로 충분히 합의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요컨대 ‘균형’도 그리고 ‘발전’도 보는 눈을 바꾸어야 한다.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만들기로부터 누구나 누려야 하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으로 전환하자. 다시 말하지만, 어느 지역에서나 사람다운 품위를 가지고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보장할 일차적 책임은 국가(그냥 ‘정부’가 아니다)에 있다.
곧 추석을 맞아 3천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고향을 찾을 예정이라고 한다. 혹시라도 겪을 고통은 꼭 일차적 연고 때문만은 아니다. 공동체가 더욱 쇠락하고 위축된다면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지역의 불평등과 양극화, 그리고 거기서 빚어지는 삶의 조건과 피폐함을 생각해 볼 좋은 기회다. 맞추어 새로 희망을 발견할 원천으로 ‘발전에 대한 권리’를 이야기해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