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지 (시민건강연구소 영펠로우)
문미순의 장편소설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은 뉴스에서나 들어 보았을 법한 이야기를 다룬다. 죽은 부모의 시신을 유기하고 부모의 연금을 대리 수령하는 자녀들의 이야기이다. 신문 속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이 이야기를 접했다면 자녀들을 손가락질하겠지만 소설 속 주인공 준성의 삶을 들여다보고 나면 누가 과연 준성을 비난할 수 있을까 싶다. 준성은 20대 남자로 야간 대리운전을 하면서 알코올성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간병한다. 그 누구보다 성실히 아버지를 간병하면서 틈틈이 물리치료사 면허증 시험을 준비한다. 준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건강은 나빠지고, 대리운전을 하다가 고가의 외제차량을 파손시키면서 위태롭게 줄타기하듯 유지해 온 준성의 삶은 위기에 처하게 된다.
우리는 준성과 같이 중증질환이나 장애가 있는 가족을 돌보는 아동·청(소)년들을 ‘영케어러(young carer)’ 또는 ‘가족돌봄청년’이라고 부른다. 높은 이혼율, 출산 연령의 증가, 인구 고령화와 같은 가족 구조의 변화로 영케어러가 증가하고 있다. 일찍이 영케어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체계적 조사를 수행해 온 국가들은 영케어러의 비율을 청소년 인구의 약 5~8%로 추정하고 있다(☞관련 자료: 바로가기). 국내에서는 최근까지 관련 통계가 전무한 실정이었다. 그러다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를 홀로 간병하다 아버지를 방치해 사망에 이르게 한 22세 청년의 간병 살인을 계기로 2022년 보건복지부에서 13~34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가족돌봄청년 실태조사를 수행하였다. 하지만 학교 밖 청소년이 조사대상에서 배제되면서 반쪽자리 조사에 그치고 말았다(☞관련 기사: 바로가기). 또한 비공식 돌봄과 관련된 연구는 주로 중·장년의 가족 간병인을 대상으로 수행되었고, 청년 간병을 주제로 한 연구는 초기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은 영케어러가 수행하는 비공식 돌봄이 영케어러 당사자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연구결과를 소개하고자 한다(☞논문 바로가기: 비공식 돌봄이 청소년과 청년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 이 연구는 호주의 가구 기반 패널 조사인 ‘HILDA’ 데이터를 분석에 활용하였다. HILDA는 15세 이상 호주인 17,000명 이상을 대상으로 경제, 복지, 노동시장 역학 및 가정 생활에 대한 정보를 종단적으로 수집하는 조사다. 이 연구에서는 HILDA 1~20차 조사에 참여한 44,663명 가운데 15~25세 연령의 참가자 11,937명을 대상으로 분석을 수행하였다. 연구진은 생활시간조사에 포함된 ‘일주일 동안 장애인 배우자나 장애가 있는 성인 친척을 돌보거나 연로한 (시)부모를 돌보는 데 사용한 시간’을 변수를 활용하였다. 비공식 돌봄 시간을 주당 0시간(비돌봄군, 비교군), 1~19시간, 20시간 이상으로 대상자를 분류하여 분석을 수행하였다. 정신건강은 ‘SF-36(Short Form-36)’과 ‘MHI-5(Mental Health Inventory)’ 도구를 활용하여 측정하였다.
분석 결과, 97.1%(8945명)의 참여자가 비돌봄군이었으며, 2.4%(715명)는 주당 1~19시간, 0.5%(226명)는 주당 20시간 이상을 돌봄 활동에 사용하고 있었다. 돌봄을 제공하는 영케어러군에서 한부모 가족의 비율과 동거 가족 중 장애가 있는 비율이 높았으며, 소득 분위는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신건강 수준은 비돌봄군이 가장 양호하였으며, 주당 20시간 이상 돌봄을 제공하는 영케어러군이 가장 취약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즉, 누군가를 돌보지 않을 때보다 돌볼 때 정신건강이 더 나빴으며, 돌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수록 정신건강 수준이 나쁜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영케어러가 가정 내에서 수행하는 돌봄이 정신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결과다.
이러한 결과에 대하여 연구진은 영케어러가 갖고 있는 취약성으로 설명한다. 보살핌을 받을 나이에 아픈 가족을 돌보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성인역 부담(adults-role burdens)’은 영케어러에게 조기성숙을 강요한다. 또한 영케어러는 가족을 돌보면서도 생애주기에 따라 학교, 직장 등의 사회활동을 병행하려고 부단히 애쓰지만, 돌봄 역할의 과부하는 학업성취, 사회참여, 또래와의 교류를 박탈함으로써 외로움, 고립감과 같은 심리적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연구진은 이러한 박탈 경험이 장기적으로 성인기의 고용과 사회진출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청(소)년기의 열악한 정신건강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우울, 불안과 자살의 위험을 증가시킨다고 경고한다.
이 연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의존이 필요한 몸과 돌봄을 둘러싼 약자화 현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영케어러는 돌봄으로 우울, 불안과 같은 정신건강 문제에 취약해진다. 또 청(소)년기 돌봄으로 인하여 사회진출을 유예하는 것은 노동시장에서 경쟁력을 약화시키며, 이는 경제적 빈곤의 악순환에 갇히는 결과를 낳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위 말하는 ‘성공’을 하려면 자신의 일에 집중하기 위하여 다른 이로부터 무수한 돌봄을 받되 동시에 누군가를 돌봐야 할 부담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돌봄을 받아야 할 생애주기에 돌봄을 수행하고 있는 영케어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약자가 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경제 구조는 누군가를 돌볼수록 그 자신도 함께 취약해지는 구조인 셈이다.
하지만 인간은 정도가 다르지만 생애주기에 따라 누구나 의존적이 되며 돌봄을 필요로 한다. 또한 돌봄을 제공함으로써 의존적 지위로 진입하게 되는 영케어러와 같은 파생된 의존인이 발생한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돌봄의 공공윤리를 주장한 철학자 에바 키테이의 ‘둘리아(doulia)’ 논의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 시대에는 산모가 아이를 돌볼 때 ‘둘라(doula)’라고 불리는 산모 도우미가 산모를 돌보았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서로 돌봄을 받을 수 있고 돌봄을 줄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 공적 윤리의 의무가 있다.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영케어러를 돌보는 ‘둘라’는 어디에 있는지, 또 우리는 스스로 영케어러의 둘라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자문하고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서지 정보
Alfonzo, L. F., et al. (2024). The effect of informal caring on mental health among adolescents and young adults in Australia: a population-based longitudinal study. The Lancet Public Health, 9(1), e26-e34.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매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는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