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복지 공약 뒤집기의 무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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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연금이 공약과 달라졌다는 것 때문에 시끄럽다. 당연히 여론이 나쁘다. 핵심은 공약을 뒤집었다는 것이다. 이 논평조차 같은 이야기를 보탤 필요는 없을 성도 싶지만, 그냥 지나가기에는 문제가 심상치 않다.

기초연금만 공약을 뒤집은 것은 아니다. 4대 중증질환의 진료비를 보장한다는 약속은 이미 크게 후퇴했다. 반값 등록금이나 무상보육 역시 내년도 예산안에 반영되지 않거나 줄어들었다.

어떤 공약이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는 자세히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금방 찾을 수 있고, 대선 토론 당시 누가 어떤 약속을 했는지 동영상까지 돌아다닌다. 어차피 그냥 잡아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사람들 말대로 대선 당시와 비교해 조건과 환경이 바뀐 것은 거의 없다. 그 때 몰랐다면 어리석은 것이고, 알고도 그런 것이면 거짓말이나 사기가 맞다. 변명치고는 궁색하다.

그래도 집권 세력의 어리석음이나 거짓말이 진정한 이유라고 믿고 싶지는 않다. 그게 이유라면 대통령과 집권당을 선택한 국민이 너무 우스워진다. 그보다는 모두들 복지 공약을 가볍게 여긴(또는 지금도 그런) 것이 이번 사태의 진짜 이유가 아닐까?

일이 불거진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현실이 달라지면 공약도 바꾸는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고 집권당이 앞장서 주장한다. 많이 생각했다는 것이 대통령의 진심어린 사과를 요구하는 정도다. 정서에 호소라는 정도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리라.

전문가들도 당초 실현 가능성이 떨어지는 공약이었다는 논평 정도로 끝이다. 물론 “내가 뭐라고 했느냐”는 지극히 전문가다운 태도이긴 하다. 그러나 공약 자체를 진지하게 문제 삼는 분위기는 찾기 어렵다.

유권자 역시 불만이 높긴 하지만 공약을 뒤집는 것에는 꽤 너그러운 것 같다. 책임을 묻거나 앞으로 그러겠다는 분위기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냥 이해하자는 태도를 보인다. 아니면, 그럴 줄 알았다는 정치적 무력감의 또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일부 보수 언론과 경제계가 열심히 바람을 잡은 것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봐도 마찬가지다. 사회 전체가 공약을 지키거나 어기는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다. 공약은 곧 ‘공약(空約)’인 것이 사회적 이해이자 공감대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치에서 공약, 특히 복지 공약은 참을 수 없이 가볍다. 무슨 사정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일까? 충분히 검증된 것이라고는 못하겠다. 그러나 기억하는 한 지난 대선까지 참고하면, 한껏 부박한 공약들은 한국 정치의 필연적 결과들이다.

우선, 대부분 복지 공약이 진지하지 못하다. 어떤 정치세력이 내놓은 것인지 크게 상관없다. 모두가 당장 유권자 입에 들어갈 당의정 정도로 여긴다. 일반론으로 말하면, 복지 공약은 그것을 내놓는 정치 세력을 대표한 적이 없다.

복지 공약은 집단과 계층, 계급의 사회경제적 이해와 떼어 놓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정당과 대통령 선거가 서로 경쟁하는 사회경제적 이해를 다르게 대변한 적이 있었던가? ‘대중’ 정당이란 허울 좋은 이름 때문에, 흔히 복지 공약은 (겉모습만 보면) 쉽게 수렴한다. 정당과 복지 공약이 좀처럼 연결되어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미시적 수준에서도 제대로 된 복지 공약은 만들어지기 어렵다. 다른 무엇보다 유권자의 참여를 기반으로 하는 일이 드물다. 대부분 공약은 정치와 그 분야 전문가가 만들고, 이해당사자도 한 몫 거든다.

그러니 참여는 추상적이고 정략적이다. 겉으로는 참여로 보이는 것도 대부분 형식에 그친다. 이미 조직화된 유력한 집단이 스스로의 이익을 반영하는 통로로 삼는 때가 흔하다. 이해의 각축이 공공의 결정을 압도하는 셈이다.

복지 공약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당연히 이런 구조적 제약을 벗어나지 못한다. 충분한 논의(이른바 ‘숙고’의) 과정이 있을 리 만무하다. 중요한 것은 이익의 계산일 뿐, 스스로 대표하고자 하는 공적 이익을 충실하게 반영할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당과 공약의 구조, 과정을 종합하면, 복지 공약의 ‘실패’는 곧 정치적 대표체계의 실패를 뜻한다. 복지 공약은 정당과 정치 세력의 화려한 치장, 그것도 잠시만 유효한 속 빈 장식인 때가 많다. 공적이고,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이기보다는, 기술적이고 정략적인 수단에 머무른다.

정당마다 비슷비슷한 공약을 쏟아내고 선거가 끝나면 쉬 잊어버리는 것이 이 때문이다. 정치인이 스스로 공약을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기고, 유권자가 이 정도에서 공약을 이해하는 것도 비슷하다.

이런 한에서는 복지 공약은 어떤 정치적 역할도 할 수 없다. 공약의 기초 역할이라 할, 다음 선거에서 평가를 하거나 책임을 묻는 데에도 쓰이기 어렵다.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잡다한 선심성 공약만 관료의 점검표에 남게 된다.

 

이런 시각에서 공약 파기 ‘소동’을 되새겨보자. 솔직하게 말하면, 박근혜 정부는 복지 공약을 배신하지 않았다. 그 반대다. 이제야말로 집권 세력이 기반으로 하는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제대로 반영하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복지 공약은 처음부터 정치적, 경제적 기반과 크게 관계가 없었다. 어차피 복지 공약은 서로 경쟁하는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집권 후에는 공약이 아니라 말하지 않았던 ‘약속’에 기울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서둘러 예측하자면, 복지 공약은 앞으로도 그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정권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데에 필요한 것 이상의 의미를 둘 가능성은 적다. 예를 들자면, 그토록 강조해마지 않는 ‘신뢰’에 대중이 여전히 미련을 가지게 할 정도를 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앞으로 복지 공약이 그대로 공약답게 하는 과제는 달리 남는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내용을 되짚는 것이 필요하다. 크게 보면, 서로 다른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 있는 정치적 대표 체계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한다.

복지를 옹호하는 정치세력의 제도화가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 날로 깊어지는 경제, 사회적 갈등을 비폭력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달리 찾을 수 없다.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그렇다.

 

다음으로, 복지 공약은 정치적 대표체계와 분리되지 않는 통합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말하지 않은’ 공약으로 지지를 얻는 후진적인 민주주의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복지 공약을 만드는 과정은 더 참여적인 것, 그리고 더 정치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당장 필요한 것도 있다. 바로 지금은 정치적 책임을 묻는 데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정치가 복지 공약의 무거움을 절실하게 깨닫도록, 그 책임을 아프게 물어야 한다. 방법은 확실하게 평가하고 정치적으로 심판하는 것이다.

다음 대통령 선거가 많이 남았다고 하나, 내년에 있는 지방선거 또한 책임을 물을 좋은 기회다. 한국의 정당은 어떤 세력보다는 여전히 개인이 중심이 되는 수준인 듯도 하다(같은 당이 재집권했지만, 정권 교체라고 하는 것을 봐도 그렇다). 그래도 정당과 집권 세력 전체에 책임을 물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나마 공약의 무거움을 깨닫게 하는 길이다. 그리고 그 책임의 가능성이 지금을 구속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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