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민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기상 이변으로 인해 올 해도 무더위와 폭우가 예상되고 있다. 최근 발생한 자연 재해나 그밖에 여러 사회적 재난을 돌아보면, 재난을 예방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재난을 겪은 사람들이 고통에서 잘 회복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고령일수록 재난에서 생존하고 회복하는 데 취약할 수밖에 없다. 노인은 시력, 청력, 인지·기억능력 저하로 재난 상황에 대한 인식이 지체될 수 있고, 운동 능력 감소 등으로 인해 재난 현장에서 신속하게 벗어나기 어렵다. 재난 이후에도 여러 사회경제적 변화를 맞닥트리게 되는데, 수입원이 제한적이며 대출이 어렵고 정부 보조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 접근성이 떨어져 경제적으로 회복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사회적 낙인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지원 신청을 주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또한 가족, 친구, 이웃과의 사회적 관계가 제한된 채 혼자 살아가는 노인일수록 재난 회복에 더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회적 자본을 구축하는 차원에서라도 재난을 겪은 사람들이 서로 만나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제공된다면 재난 회복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오늘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피해 지역에서 노인 주도로 만들어진 모임 공간이 재난을 겪은 주민들의 회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연구한 논문을 소개하고자 한다(☞논문 바로가기: 일본 오후나토의 사회적 자본 구축 개입과 재난후 회복에 대한 자가보고).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에도 많은 노인이 이동성 저하와 정보 부족으로 대피처로 피하지 못했으나, 이웃과 가족의 도움을 얻은 사람들은 재난 현장에서 탈출하여 살아남았다. 2011년과 2013년 브리즈번 홍수에서도 노인 생존자들은 자신이 회복하는데 있어서 유대감을 느낀 네트워크와 지역 사회 구성원들의 도움이 매우 중요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사회적 자본이 노인들에게 중요하다는 점을 감안하여, 2011년 대지진을 겪은 토호쿠 오후나토 지역에서는 노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지역사회 기반 사업인 “이바쇼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관련 자료: 바로가기). 이바쇼는 2013년부터 생존자들이 임시 거처 외부에서 자유롭게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이바쇼 카페는 지역 노인들을 위한 정기 모임을 열고, 이 외에도 아이들, 젊은 엄마들을 위한 지역 모임을 열기도 하였다.
연구진은 이바쇼 카페에 더 많이 방문할수록 재난 회복 수준이 더 높아질 것이라고 가설을 세운 후 2014년 가을 설문 조사를 진행하였다. 이와 더불어 사회적 자본의 측정 지표로 널리 쓰이는 봉사단체 참여도, 친구 수, 지역사회 구성원에 대한 신뢰도가 재난 회복과 어떤 상관 관계를 보이는지 확인하였다.
분석 결과, 연령, 성별, 거주 기간, 교육 수준, 수입원 등과 같은 변수를 통제한 후에도 이바쇼 방문 횟수가 1회 늘어날 때마다 가족이 회복하고 있다고 느낀다는 답변은 18.2% 증가하였으며, 이웃이 회복하고 있다고 느끼는 답변은 13.9% 증가하였다. 사회적 자본을 대변하는 다른 지표들은 이바쇼 카페 방문 횟수만큼 강력하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가족과 이웃의 회복과 긍정적인 연관성을 보였다. 가족의 회복에 대해서는, 봉사단체 참여, 친구 수, 지역사회 구성원에 대한 신뢰 모두 긍정적인 연관성을 보였고, 이웃의 회복에 대해서는 지역사회 구성원에 대한 신뢰 지표만 통계적으로 유의한 연관을 보였다.
이바쇼 카페는 흡사 올해 초 개봉한 영화 “나의 올드 오크”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 속 오래된 펍 ‘올도 오크’는 시리아 난민들과 쇠퇴하고 있는 지역 주민들이 모여 함께 밥을 먹는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연대와 희망을 준다. 영화 안에서 전쟁을 피해 나라를 떠난 사람들, 쇠퇴하는 지역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던 사람들이 서로 만나 힘을 얻었듯이, 큰 재난을 겪은 약자들이 함께 모이는 공간을 찾는 것만으로도 회복하는 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아무리 개인주의 시대라 해도, 지역사회가 앞장서서 소통의 장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여기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바쇼 프로젝트의 주역이 노인들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저 노인을 돌봄의 대상으로만 인식하던 데에서 벗어나 노인들에게 지역사회 회복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와 권한을 부여한 결과, 자신들의 개인적 회복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회복과 유대감 강화를 주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재난 피해 노인도 지역사회 회복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노인을 차별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데 필요한 인식 아닐까.
*서지 정보
Lee, J., Aldrich, D. P., Kiyota, E., Yasuhiro, T., & Sawada, Y. (2022). Social capital building interventions and self-reported post-disaster recovery in Ofunato, Japan. Scientific reports, 12(1), 10274.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매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는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