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연구통

벽장 밖으로 나온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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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밍아웃 경험이 성소수자의 정신 건강에게 미치는 영향 –

 

이혜민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성소수자 자긍심의 달(Pride Month)로 지정된 매년 6월은 전 세계 곳곳이 무지개 빛으로 가득 채워진다. 올해는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연구실 멤버들과 함께 워싱턴 DC에서 열린 자긍심 행사에 참여해 무지개가 가득한 공간에서 전시도 보고 드랙 퍼포먼스도 즐겼다. 행사가 끝난 후 근처에서 저녁을 먹으며 자연스럽게 각자 처음 참여한 자긍심 행진(Pride Parade)이 언제였는지, 처음 커밍아웃한 경험이 어땠는지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특히 커밍아웃은 어떤 상황에서 했는지, 그 대상이 누구였는지 그리고 그 대상의 반응이 어땠는지에 따라 각자에게 다른 경험으로 남아있었고, 단순히 좋았거나 나빴던 경험이라고 단정짓기 어려운 복잡다단한 결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이후로 성소수자 집단이 사회적으로 가시화되면서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만연하고, 성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과 제도가 온전히 마련되어 있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벽장 밖으로 나가 내가 성소수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일 수 있다.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등 본인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에 따라서 누구에게, 어떻게 내 정체성을 드러낼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는 점에서 커밍아웃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닌 “성소수자에게 주어진 끝없는 과업”(정성조 & 이희영, 2023)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가 커밍아웃을 어떻게 겪고 있는지 그리고 커밍아웃 경험이 이들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국내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 그런 상황에서 최근 한국 청년 성소수자의 커밍아웃 경험과 정신건강 사이의 연관성을 분석한 연구가 국제학술지에 출판되어 소개하고자 한다(☞논문 바로가기: 한국 성소수자의 커밍아웃과 가족 우울증 관계의 성별 차이). 성소수자 정체성을 묻는 국가 대표성을 지닌 설문조사가 부재한 상황에서(이호림 외, 2022) 이 연구는 성소수자 인권단체에서 직접 수행한 국내 최대 규모의 설문조사 <2021 청년 성소수자 사회적 욕구 및 실태 조사>를 활용하였다. 특히 만 19세 이상 만 34세 이하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2,381명 중 본인의 가족(어머니, 아버지, 형제자매)에게 커밍아웃한 이들은 얼마나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커밍아웃 경험이 우울 증상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분석하였다. 또한 커밍아웃 경험과 우울 증상 간의 상관관계가 성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지도 살펴보았다.

 

연구 결과,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중 어머니, 아버지, 형제자매를 포함한 가족 모두에게 커밍아웃한 참여자는 매우 적었다.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2,381명 중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본인이 성소수자라는 것을 밝힌 이들은 10명 중 한 명(12%)에 불과했고, 가족 중 아무에게도 커밍아웃하지 않은 이들은 절반이 넘었다(57%). 가족 중 적어도 한 명에게 커밍아웃한 경우, 그 대상으로는 형제자매에게만 밝힌 경우(17%)가 가장 많았으며,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에게 밝힌 경우(2%)가 가장 적었다.

 

커밍아웃 경험은 성별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였다. 가족 모두에게 커밍아웃한 비율은 성별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가족 중 누구에게도 커밍아웃하지 않은 비율은 레즈비언과 바이섹슈얼 여성(51%)보다 게이와 바이섹슈얼 남성 참여자에서 더 높게 나타났다(63%). 형제자매에게만 커밍아웃하거나 형제자매와 어머니에게 커밍아웃하는 경우는 게이와 바이섹슈얼 남성(12%)보다 레즈비언과 바이섹슈얼 여성 참여자(21%)에서 더 높았다.

 

보통 커밍아웃은 본인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이를 건강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의 일부로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져 왔지만, 커밍아웃이 성소수자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연구 결과는 일관되지는 않았다. 이 연구에서는 가족을 대상으로 한 커밍아웃 경험이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의 정신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체적으로, 아무에게도 커밍아웃 하지 않은 참여자에 비해 가족 구성원 중 적어도 한 명에게 커밍아웃을 한 참여자가 더 높은 수준의 우울 증상을 보고했다. 특히, 형제자매에게만 본인이 성소수자라는 것을 밝히거나(즉 부모 두 분 모두에게 밝히지 않은 경우)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밝힌 경우에는 커밍아웃 경험이 우울 증상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유의했다.

 

성별에 따라 나눠봤을 때, 커밍아웃 경험과 우울 증상 간의 상관관계는 게이와 바이섹슈얼 남성에서만 유의했고, 레즈비언과 바이섹슈얼 여성에서는 뚜렷한 상관관계가 발견되지 않았다. 특히, 아무에게도 커밍아웃하지 않은 남성 참여자에 비해 가족 모두에게 커밍아웃한 남성 참여자가 더 높은 수준의 우울 증상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결과는 커밍아웃한 이후 가족들의 반응과도 연결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추가 분석 결과, 레즈비언과 바이섹슈얼 여성보다 게이와 바이섹슈얼 남성이 본인의 커밍아웃 이후에 가족들이 보일 부정적인 반응에 대해 더 걱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커밍아웃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여성 참여자보다는 남성 참여자에게서 더 크고, 특히 남성 참여자의 경우 부모 모두에게 커밍아웃하는 상황을 가장 큰 스트레스로 여겨 우울 증상에도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을 확인했다.

 

이 연구는 한국 사회에서 청년 성소수자의 커밍아웃 패턴을 파악하고, 이들의 커밍아웃 경험이 정신건강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분석하였다. 연구 결과를 기반으로, 앞으로 청년 성소수자가 편안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커밍아웃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가족들에게 커밍아웃한 이후 온전한 자기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져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어떤 환경이 조성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진행되어야 할 차례이다.

 

 

*서지 정보

Lee, H., & Jeong, S. J. (2024). Gender Differences in the Relationship between Coming Out as LGB to Family and Depression in South Korea. Society and Mental Health, 1-17.

정성조, & 이희영. (2023). 개방형, 은둔형, 억압형 벽장: 청년 성소수자의 커밍아웃 양상에 관한 잠재집단분석. 한국사회학, 57(4), 49-93.

이호림, 이혜민, 주승섭, 김란영, 엄윤정, & 김승섭. (2022). 국가 대표성 있는 설문 조사에서의 성소수자 정체성 측정 필요성: 국내외 현황 검토와 측정 문항 제안. 비판사회정책, (74), 175-208.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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