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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의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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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대통령이 석유 가스 매장 가능성에 대해 발표했다. 발표 형식부터 내용까지 다양한 측면에서 비판이 나온다. 크게 이렇게 나눠볼 수 있겠다. 먼저, 발표 자체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현재 정부의 의뢰를 받은 업체에 대한 의혹들, 이전 탐사업체가 이미 15년간 조사하고서도 철수한 정황을 보았을 때, 숨겨진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다. 둘째는, 발표 자체를 신뢰한다 해도 경제성이 낮다는 비판이다. 정부가 제시한 확률 역시 20%에 불과한데, 개발 사업에 막대한 예산이 투입하는 것이 맞는지, 그 예산을 다른 곳에 지출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지적이다. 셋째는, 경제성과 무관하게 석유 가스 채굴 계획 자체에 대한 비판이다. 현재 기후위기의 심각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데, 화석연료 채굴이 가당키나 하냐는 것이다.

 

우리는 석유 가스 매장 가능성과 채굴 계획 자체에 대해 더 이상 말을 보태지는 않으려 한다. 다만 이번 발표와 관련한 주변의 표현들에 주목한다. ‘미래에 대한 투자’,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 의식’, 더 나아가 ‘산유국의 꿈’ 같은 것들 말이다. 이번 발표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간 많은 정책의 논의에서 ‘미래’가 호명되고는 했다. 마치 우리가 모두 동의하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바람직한 미래, 혹은 꿈 같은 것이 있고, 그들의 주장대로 하면 비극적 미래가 아닌 희망찬 미래라는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처럼.

 

과연 그런가. 석유가스 매장 가능성에 대한 발표도 여러 측면에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미래’에 대한 언급을 신뢰할 수 있는가. 유력 정치인, 정책결정자, 경영인, 전문가 등 자주 사회적 발언을 하고, 그 발언에 무게가 실리는 사람들이 공적으로 ‘미래’를 위해 무언가 하자고 발언할 때, 어쩌면 그 ‘미래’는 미사여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실은 본인의 사적인 이익 추구, 정치적 기반 확보, 인정 욕구 충족 등 숨겨진 목적이 있을 수 있다. 이를테면, 재벌총수가 기업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진짜 목적을 뒤로 하고, 기업의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기업 합병을 추진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들의 숨겨진 목적을 분명히 찾아내는 건 쉽지 않다. 공익적 측면과 사적인 이해관계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얽혀 있는 것이 세상만사 아닌가. 거기다 다른 의도를 가진 쪽도 허술하게 본심을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니, 잡아떼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대로 일이 진행되면 원하는 미래에 가까워질 수 있는가? 예컨대 의대 증원 논의를 보자. 정부는 미래 세대에 책임을 전가하지 않겠다며 의료개혁을 추진하겠다 하고, 의사협회는 한국의료의 미래를 위해 의대 증원을 저지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의사 수가 늘어나지 않고서는 미래에도 의사 부족과 쏠림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워 보이고, 마찬가지로 시장에 내맡긴 정부의 의료개혁으로도 의사 쏠림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이처럼 문제에 대해 제시한 해결책이 문제 해결과 어긋날 때, 자연스럽게 숨겨진 의도가 없는지 다시 의심하게 된다. 정부가 목표로 하는 것이 정말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게 맞는 걸까. 복잡한 문제를 뭉뚱그리고 단순화하여 뭔가 하는 척하면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은 아닐까. 혹은 국가 책임을 약화시키고 시장을 강화하려는 기조를 밀어붙이는 게 진짜 목적은 아닐까 하는 의심 말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하게 살펴볼 것은 그 미래는 누구의 미래인가, 또한 그것은 바람직한가 하는 것이다. 정부는 미래 세대에 부담을 전가하면 안 된다면서 재정건전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만 재정건전성이 의미 있는 것이지, 사람들의 삶을 방치하며 재정건전성을 사수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본다.

 

미래 세대의 부담을 말할 때, 그 반대편에는 자연스럽게 기성세대가 위치하지만, 이는 다른 축들을 가리는 효과가 있다. 이를테면, 국가의 재정건전성을 요구하는 금융 채권자와 예산 삭감으로 공적 서비스를 받지 못하게 되는 시민들 간의 대립 같은 것 말이다. 또한 미래 세대의 부담을 말하지만, 정확히 누구의 부담을 말하는가. 여러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개인이라면 기성세대든 미래 세대든 공적 서비스 축소의 영향을 받지 않겠지만, 공적 서비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면 기성세대든 미래 세대든 위기에 처할 수 있다. 결국 뭉뚱그려진 ‘미래’는 장애인, 노인, 이주민, 빈곤층, 성소수자 등을 배제하고, 누군가의 미래는 더욱 보호하는 불평등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고 원하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조정한다. 다시 말해 현재가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만, 미래에 대한 예측과 지향이 현재를 구속한다. 구체적인 정책 시행뿐만 아니라 단순히 예측, 전망 그 자체가 사람들의 인식과 실천에 영향을 미친다. 그 영향은 미래를 걱정하며 현재의 부정의를 정당화하는 것일 수도, 미래를 위해 당장 마주한 고통을 뒤로하는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생각해 볼 일이다. 산유국이라는 장밋빛 미래든, 연금 기금과 건강보험 재정이 고갈되는 미래든, 생산가능인구 비중을 늘리기 위해 노인을 이민 보내는 미래든, 누가, 누구의 어떤 미래를 위해 어떤 현실 개입을 하려는 건지. 목소리 들리지 않는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지금, 여기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미래 담론은 어떻게 가능한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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