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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을 위협하는 주거 불안, 누구의 책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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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지 (시민건강연구소 영펠로우)

 

지난 5월 대구에서 전세사기 피해자가 목숨을 끊는 일이 또다시 발생했다. 벌써 8번째 사망이다. 지난해 6월 1일 전세사기 특별법 시행 이후 1년간 총 1만 7593명의 피해가 확인되었고, 피해자들의 금전적, 정신적 고통은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제정된 전세사기 특별법의 실효성에 대한 비판으로 야당의 주도 하에 전세사기 피해자의 보증금반환채권을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등이 직접 매입하여 피해 임차인을 구제하는 소위 ‘선구제 후회수’ 방안을 골자로 한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 상임위를 통과하였다. 이 개정안 역시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제대로 구제하고 보호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하여 일각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지만(☞관련 기사: 바로가기) 윤석열 대통령은 이 미흡한 개정안에 대해서조차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주거는 가장 기본이 되는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이다. 최근 국제학술지 <사회과학과의학>에도 주거불안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논문이 출판되었다(☞논문 바로가기: 주거 불안이 정신건강, 수면, 고혈압에 미치는 영향).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영국 중앙정부는 긴축정책의 일환으로 임차인에 대한 주택수당 지급을 삭감하였고, 지방정부 역시 주택 서비스에 대한 지출을 40% 감소하였다. 연구진은 주거비용 증가와 주거에 대한 공적지원 감소로 초래되는 주거불안이 미치는 사회경제적, 심리사회적, 신체적 위험에 주목하였다. 선행연구들이 주거불안을 주택압류로 한정하여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살폈다면, 이 연구에서는 주거불안의 범위를 주택담보대출 보유자의 대출 연체와 임차인 퇴거조치까지 확대하여 그 영향을 확인하였다.

 

이를 위하여 연구진은 다음과 같은 연구질문을 수립하였다. (1) 주거불안을 경험하면 정신 건강이 나빠지고 수면 장애 또는 고혈압이 발생하는가? (2) 이러한 관계는 인구사회학적 요인에 따라 달라지는가? (3) 정부의 긴축정책으로 인해 공적 지원이 삭감되는 곳에서 이러한 영향이 더 커지는가? 연구진은 영국 정부의 긴축정책 도입이 신체·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기 위하여 2009~2019년 기간의 가구 기반 종단 자료인 UKHLS 데이터, 그리고 지방정부의 재정서비스와 고용 관련 데이터를 활용하였다. 주거불안은 지난 12개월 동안 임대료 연체나 주택담보대출 상환 연체 경험과 같이 임대료 지불문제를 겪었거나 강제 퇴거를 경험했는지 여부로 확인하였고, 건강결과 변수로는 일반 정신건강척도(GHQ-12도구), 수면장애, 고혈압 발생여부를 사용하였다.

 

분석 결과, 지난 1년간 주거비 지불과 관련하여 주거불안을 경험한 비율이 9%를 차지하였다. 주거불안을 경험한 경우 정신건강이 악화될 위험이 2.5% 포인트 증가하고, 수면 장애 위험은 2.0% 포인트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거와 재정 불안에 더 많이 노출되는 인구집단인 세입자, 청년층, 저학력 가구, 유자녀 가구, 그리고 긴축정책의 영향을 많이 받는 지역에 거주하는 경우일수록 일관되게 이러한 건강 위험이 더 높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반면 주거불안이 고혈압 발생에 미치는 영향은 유의미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결과는 주거가 음식, 의복과 더불어 인간 생활의 필수 요소임과 동시에 강력한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주거 안정성 문제가 건강불평등을 심화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긴축정책으로 주거비 지원이 가장 많이 삭감된 지역에서 정신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이 더 크게 나타났다는 사실은 주거 안정을 도모함으로써 건강을 보호하고 건강불평등 완화에 앞장서야 하는 국가의 역할과 책무성이 크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있다.

 

오늘 살펴본 연구의 배경이 된 영국의 상황과 한국의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으며, 오히려 더 심각하다고도 볼 수 있다. 지난해 9월 서울 강서구 전세사기 피해자 239명을 대상으로 수행한 한 실태조사 결과, 보증금 위기가구의 81.2%에서 신체건강 문제가, 96.6%에서 정신건강의 악화를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관련 기사: 바로가기).

 

주거권은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 권리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35조 1·3항에는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갖는다’, ‘국가는 주택개발정책 등을 통해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정부는 전국에서 벌어진 유례없는 대규모 전세사기 사건의 피해자들을 실질적으로 구제하는 일에, 또 주거 약자를 위한 공공임대주택 공급 확대하는 일에도 모두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정부는 저출생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할 당면과제라고 내세우지만, 정작 많은 청년들이 주거비용 부담으로 연애·결혼·출산을 늦추거나 포기하고 있다. 심지어 정부가 잘못 설계하고 운영한 제도적 허점 때문에 많은 이들이 전세사기 피해자가 되어 고통을 받으며 건강마저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사회를 과연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까?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 권리이자,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으로서 주거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는 일에 함께 관심을 가지며 정부의 역할을 촉구해야 할 때이다.

 

*서지 정보

Mason, K. E., Alexiou, A., Li, A., & Taylor-Robinson, D. (2024). The impact of housing insecurity on mental health, sleep and hypertension: analysis of the UK Household Longitudinal Study and linked data, 2009-2019. Social Science & Medicine, 116939.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매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는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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