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보건과 복지를 위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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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으려고 해야 숨을 수가 없는 세상이다. 공식과 비공식, 합법과 불법, 자발적과 비자발적 수단이 모두 동원되어 개인을 추적한다. 우리 모두 익명은 불가능한 시대에 산다.

검찰총장쯤 되는 높은 사람의 이주 사사로운 정보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터무니없이 공공성을 내세우는 언론의 보도하며, 관음증적 관심에 치우친 공적 토론에 사정없이 드러나 있다. ‘공적’ 관심은 조금 남은 민망함을 꾸미는 말일 뿐이다.

이런 ‘공작적’인 정보는 법과 윤리를 쉽게 무시한다. 아무 책임도 없는 다른 관련자의 개인정보를 어떻게 알아냈는가는 아예 문제도 되지 않는다. 혈액형이니 주민등록번호, 주소지 같은 기본 정보는 더욱 더 그렇다.

정략과 공작은 쉽게 남의 일이지만, 모두가 어느 정도는 간여하는 것이 인터넷이다. 상업적 목적의 정보 수집과 유출에 피해자가 되는 일은 워낙 많다. 게다가 여러 개인이 정보를 만들고 유출하는 데에 알게 모르게 힘을 보탠다. ‘신상 털기’니 ‘네티즌 수사대’ 같은 한국적 현상은 그냥 흥밋거리로 보기 어렵다.

물론 자발적 정보 노출도 부지기수다. 이른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그냥 뻔히 드러나는 시시콜콜한 정보가 넘쳐난다. 굳이 수집하고 분석할 필요도 없이, 날 것 그대로의 개인 정보다.

이와는 전혀 규모와 수준이 다른 것은 ‘체제’ 수준의 정보 문제다. 가장 최근에는 미국 정보당국의 활동이 보도되었다. 이들이 이메일과 전화, 실시간 채팅 등 무차별로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감시해 왔다는 것은 비밀 아닌 비밀이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과 같은 큰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알려진 비밀을 가지고 새삼 요란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오히려 좀 당황스럽긴 하다. 그러나 한국 안에서는 그나마 아무 관심이 없는 것이 더욱 이상하다. 크게 예상을 벗어나지 않아서, 나와는 상관없으니, 그게 뭐 문제라고 등등,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느 쪽이든 대부분 사람들에게 이런 개인정보는 ‘그들’만의 일인 모양이다.

공작과 정략, 인터넷, 기업과 자본, 국가와 정보기관. 이제 개인정보는 사방팔방으로 노출되어 있다. 휴대 전화 추적에, 버스와 지하철 타는 것까지 나를 실시간으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싹하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그 자체로 문제다. 프라이버시가 존중되는 것은 근대적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인권 가운데 하나다. 모든 인권이 부르주아지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중요하긴 마찬가지다.

개인 정보가 한 곳에 모이고, 활용 또는 악용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흔히 해킹이나 스팸을 떠올리지만, 그건 초보적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도덕적 판단이 쉽다는 점에서 차라리 간단한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국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사회 질서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이루어지는 제도적이고 체계화된 개인정보 수집을 더 주목해야 한다. 스팸과 달리 이런 종류의 정보는 공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쉽게 정당화된다. 나아가 의도적으로 촉진되고 장려되며, 중요한 정책목표가 되는 일이 흔하다.

제도화된 정보 수집의 문제는 우발적 사고와 부작용으로서의 프라이버시 침해에 비할 바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감시’체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개인 정보를 활용하여 사회를 조직화하는 원리가 만들어지면 피할 수 없다. 감시란 곧 정보를 활용해 각 개인을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뜻한다.

이쯤 되면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좀 더 가까운 것은 푸코가 말하는 ‘판옵티콘’일 것이다. <감시와 처벌>에서 말한 현대 국가의 장치 가운데 하나다. 현대 사회는 마치 죄수들을 감시하는 판옵티콘(원형감옥)처럼 개인의 모든 생활과 활동을 감시하고 통제한다. 여기에는 고도로 발전한 정보기술과 체계가 기여한다.

푸코의 주장에 따르면, 발전된 정보기술로 감시와 통제가 가능해졌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사회 구성원 각자가 규율과 감시를 내면화하여 결국 ‘훈육적 권력’에 순응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감시하고 조심하는 사회. 우리 사회에서 이미 익숙해진 ‘자기 검열’은 바로 이런 내면화 과정을 압축해서 나타낸다.

푸코의 말을 공허한 이론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사실 안보나 테러를 핑계 삼은 정보 수집은 노골적이라 덜 위험한지도 모른다. 권력에 도전하는 다른 생각과 금기를 스스로 감시하고 삼가게 하는 것이 이런 장치의 진정한 가치이다.

푸코가 지나치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국가가 얼마간 이런 속성을 지닌다는 것을 통째 부인하기는 어렵다. 의료와 복지를 기초로 한 국가의 개입, 특히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개인 정보를 제도적으로 국가 운영에 활용하는 것은 현대 국가의 핵심 특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 사회의 정보 ‘편집증’은 유난하다(분단과 안보의 영향이 컸으리라 짐작한다). 주민등록번호라는 세계적으로도 가장 정교하고 종합적인 정보 기반을 갖추고 있는데다,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수많은 정보 장치들을 운영하고 있는 중이다(연말 정산의 ‘정보화’ 속도와 수준은 편리하지만 또한 두렵다).

건강보험의 정보망은 그 중에서도 가장 방대하다. 전체 국민의 의료이용 정보는 물론, 소득과 재산을 포함한 엄청난 정보를 가지고 있다. 고위 공직자의 인사청문회에서도 가장 먼저 동원될 정도의 풍부함을 자랑한다.

기술적으로 가장 ‘선진적’이라는 데에 토를 달 수 없다. 행정부가 자랑스러운 성과로 이야기하고, 여차하면 수출에 나설 태세인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정교한 정보 시스템은 하나의 거대한 역설이다.

전체 국민을 쪼갤 필요가 없다면 정보체계는 훨씬 간소해졌을 것이다. 상상력을 발휘해서, 보험이 아니라 조세를 기반으로 하는 (영국의 공영의료체계와 같이) 건강보장제도였다면? 아예 전체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역설도 있다. 당초에 가입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지만, 이제 모든 가입자는 알게 모르게 이 시스템의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다. 내 진료실적은 모아지고 분석되어 ‘과다 이용자’가 되거나 도덕적 해이의 당사자로 지목된다. 언젠가는 민간보험 가입을 거절하는 자료가 될지, 또는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자료가 될지도 모른다.

아마도 건강보험이 좋은 선례가 되었던 모양이다. 박근혜 정부의 공약이 달라지고 실행 계획이 만들어지면서 점점 더 정교한(?) 정보를 바탕으로 할 참이다. ‘자격 있는’ 사람을 정해야 하는 선별 복지의 필연적인 결과다. ‘정보 국가’는 말하자면 선별 복지의 필수적인 인프라 노릇을 한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소득 수준에 따라 처우를 달리해야 하면, 소득을 끝자리까지 파악해야 하고 관련된 개인정보도 그만큼 더 많아진다. 엄청난 행정 비용은 둘째 치고, 숟가락 갯수까지 알아야 제도의 취지가 살아날 수 있다. 필요한 정보체계는 더 정교하고 폭이 넓고 방대해진다.

더 세부적으로, 더 정확하게,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의 가치는 절대적이다. 형평성, 효율성, 편의, 맞춤형 등 명분은 다양하다. 더구나 도덕적 해이를 막는다는 목표 앞에서 ‘정보 국가’의 위험을 성찰할 겨를이 없다.

전국민 정보체계가 잘 작동할지는 다른 문제다. 심지어 개인의 생각까지 정보로 모을 참인 이 거대한 정보체계가 어떤 두려운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가 오늘의 관심이다. 거의 모든 것이 파악되는 사회, 그리고 그 속에서 사는 우리의 삶.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스스로 검열하게 될 것인가. 정보 국가, 그리고 감시 국가의 가능성 때문에라도 다시 묻는다. 어떤 복지국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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