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기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1990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과 서로 분단된 독일이 재통일한 것이다. 통일은 독일 사회에 많은 과제를 가져왔다. 그중 하나가 동독과 서독의 기대수명 격차, 즉 지역간 건강불평등 문제였다.
분단 이후 동독과 서독의 기대수명은 1960년까지 비슷한 속도로 증가했다. 주로 공중보건 정책을 통해 감염병 퇴치에 성공한 덕분이다. 하지만 정치사회적 맥락 속에서 동독이 의료체계에 충분한 재정을 투자하지 못하고 심뇌혈관질환이 증가하면서 기대수명이 정체되기 시작했다. 재통일 시점에 두 지역의 기대수명은 3년 넘게 벌어져 있었다.
“함께해야 할 것은 결국 함께 할 것이다(Was zusammengehört, wächst zusammen).” 통일된 독일 사회는 화합을 향한 정치적 비전을 공유하고 동독의 경제와 생활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건강 영역에서 불평등은 빠르게 감소하여 2020년에 이르면 남성의 기대수명 격차는 3.5년에서 1.5년으로 좁혀졌고, 여성에서는 격차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 놀라운 성과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크게 세 가지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첫째는 행동주의적 설명이다. 건강행동 양식은 지역의 문화에 체계적인 영향을 받는데, 흡연이나 음주처럼 건강에 해로운 행동을 더 많이 하던 동독 주민들이 통일 후 이러한 행동을 줄였다는 것이다. 둘째는 심리사회적 경로다. 사회적 억압이나 정치적, 경제적 불안은 부정적인 정서를 유발하며, 이는 다시 건강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친다. 통일 독일의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가 안정감을 높여 사람들의 건강이 좋아졌을 수 있다. 마지막 가설은 물질적 설명이다. 생활 수준에 따라 서비스 접근성이 달라질 뿐 아니라 노동조건, 주거환경 등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조건도 함께 좌우된다. 통일 후 동독으로 대규모의 공공 이전이 이루어져 사회보장 급여가 증가하고 생활 수준이 향상되어 건강도 좋아졌을 가능성이 있다.
오늘 소개할 연구는 세 가지 가설 중 어떤 경로가 결정적이었는지 파악하기 위해 1994-2020년의 계량자료를 분석했다(☞논문 바로가기: 독일 통일 후 지역간 건강불평등 감소와 관련된 요인). 베를린을 제외한 15개 주를 분석 단위로 삼아 남성과 여성의 기대수명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살펴보았다. 행동주의적 가설에 대한 변수는 음주 관련 교통사고 사상자 수로 삼았고, 심리사회적 가설에 대한 변수는 보고된 삶의 만족도로 설정했다. 물질적 경로는 서비스 접근성과 생활 수준으로 나누어, 전자는 혈관조영실 수를 의료비 지출의 대리지표로 삼고 후자는 연금, 실업급여, 아동수당 등 사회보장 급여 지출로 살펴보았다.
동독에 속했던 주와 서독에 속했던 주의 추세를 각각 살펴보았을 때 모든 변수의 값이 두 지역에서 빠르게 수렴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사회보장 급여는 1995년 이전에 동독 지역이 서독 지역을 추월했다. 기대수명 격차를 줄이는 데 관련된 요인을 확인하는 분석에서 일관되게 중요한 변수는 사회보장 급여가 유일했다. 구체적으로 동독 지역에서 사회보장 급여가 10% 증가할 때마다 기대수명은 남성 1.05개월, 여성 0.57개월씩 증가했다. 연금, 아동수당, 실업급여를 나누어 분석했을 때는 연금의 효과가 가장 결정적이었다.
요컨대 독일의 성공적인 건강불평등 완화를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은 물질적 경로가 가장 유력한 것으로 나타났다. 통일 후 동독 지역주민들의 생활 조건이 나아지면서 건강도 좋아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서독에서 발전한 사회보장제도가 동독 지역에 도입되면서 연금과 실업급여가 빠르게 확대되고 빈곤율이 낮아졌다. 25년간 매년 약 700억 파운드의 재정이 동독 지역의 사회경제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투입되었다.
독일의 사례로부터 건강불평등 완화 전략에 관한 비법을 기대했다면, 다소 맥 빠지는 결과일지 모르겠다. 물질적 조건이 건강과 깊게 관계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사실 지역간 건강불평등을 비롯한 수많은 난제의 해결 방법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그 방법을 구현하기 위한 정치적 의사결정이 난망할 뿐.
그런 면에서 이 연구의 의의는 지식의 발견 너머에 있다. 사회구성원 공동의 비전과 정치적 결정을 통해 건강불평등 문제를 다룰 수 있다는 믿음, 사회의 건강에 관한 정치경제학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관점. 연구진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이 믿음과 관점을 전제하면 궁금해지는 것은 그 다음이다. 우리 사회는 공동의 비전을 복원 또는 창출할 수 있을까? 그 정치적 과정은 어떻게 가능할까?
*서지 정보
Simpson, J., Albani, V., Kingston, A., & Bambra, C. (2024). Closing the life expectancy gap: An ecological study of the factors associated with smaller regional health inequalities in post-reunification Germany. Social Science & Medicine, 362, 117436.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매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는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