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가 본격적으로 ‘정상화’를 앞장세울 기세다.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의 3대 추진전략 가운데 하나라니 몰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김빠지게 할 의도는 아니지만, 우선 이 말은 해야 하겠다. 어떻게 시작했든 이제 정상화 담론은 나름의 생명력을 가지게 되었다. 다른 이가 아닌 대통령이 이처럼 강조했으니, 한국적 상황에서 앞으로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질까 짐작하고도 남는다.
모르긴 해도, ‘정상화’란 이름이 붙은 온갖 추진계획과 위원회, 운동을 보게 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건강보험공단은 벌써 ‘건강보험 정상화 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가는 길은 녹색성장이나 창조경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기 저기 귀걸이 코걸이 식이 될 공산이 크다.
새 정부가 하는 일로 치면 시작은 평범했다. 모두 알다시피, 80개의 정상화 과제를 뽑아서 발표한 것이 지난 12월이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명분도 괜찮다. “사회 곳곳에 잘못된 제도와 관행을 찾아보고 이를 정상화하는 작업을 본격 추진”한다는 것이다.
1차 정상화 과제로 공공부문과 민생에 초점을 맞춘 10대 분야, 핵심과제 48개와 단기과제 32개를 선정했다고 한다. 까짓것 숫자야 좀 많으면 어떤가, 내용이 괜찮으면 봐줄 만하다. 좀 수상한 것도 있지만 상당수는 누구라도 시비 삼기 어렵다. 국민의 눈높이와 체감, 발본색원과 같은 목표도 굳이 깎아내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벌써 과거사가 되었다. 벌써부터 진화와 변신을 거듭하고 있으니 처음에 정상화가 무엇을 뜻했는지 묻는 것은 이미 부질없다. 게다가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 한 기자회견에서도 힘주어 강조했으니 이제 새롭게 ‘생명력’을 얻은 것이 분명하다.
실무 프로그램과 정책을 넘어 더 높은 차원의 전략이 되었으니 이후가 문제다. 어찌 보면 처음부터 이런 운명이 예비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건 조각나고 사소한 과제를 벗어나 ‘국정방향’의 지위를 얻은 것은 그냥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의 철학이자 ‘프레임’으로 쓰일 공산이 큰 만큼, 열거된 여러 정책의 내용과 목표는 덜 중요하다. 전체 구조, 그리고 맥락과 근본을 따지는 해석을 보태야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불안이 앞선다. 비정상의 정상화가 아니라 더 많은 불평등과 차별화된 고통, 그런 의미에서 비정상의 심화를 불러오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다른 무엇보다, 정상화라는 틀이 불균형한 권력에 기초해 억압과 차별, 그리고 배제를 낳기 때문이다.
정상은 비정상을 전제로 하고 그 구분은 반드시 권력 관계를 반영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장애와 질병, 학력, 비정규 노동 등 잘 알려진 것은 물론이고 가족 구조와 이주민, 성별 분업과 평등에 이르기까지 정상과 비정상은 기울어진 권력 관계의 다른 이름이다.
그 정도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다. 편 가르기는 대부분 낙인과 오명, 그리고 차별과 배제로 이어진다. 이를 통해 비정상이라 이름 붙은 것들을 주변으로 밀어낸다. 따라서 섣부른 정상화 주장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위험하고 불온하다.
그런 가능성과 위험 때문에 정상화 주장 속에 들어있는 권력을 드러내고 해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이 논의를 다시 정상으로 되돌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 여기서는 몇 가지만 꼽아본다.
첫째, 정상을 말하고 그와 구별되는 비정상을 선언하는 영역을 골라내는 데에 이미 어떤 치우친 판단이 작동한다. 무엇이 정상인가를 따지기 이전에 등장하는, ‘정상성’을 둘러싼 근본적 권력관계다.
다른 것도 많지만, 예를 한 가지만 들자. 정부가 정상화가 필요하다고 꼽은 10대 분야에 ‘복지급여 등 정부지원금 부정수급 근절’이 들어있다. 그런데 이 분야가 대상으로 선정된 것에 이미 정상과 비정상을 규정하는 기울어진 권력 관계가 작용한다.
맥락을 빼고 보면, 받지 않아야 될 사람이 급여를 받는 것, 즉 부정수급이 비정상이라는 데에 동의한다(적어도 현행법과 제도의 테두리 안에서는).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제대로 된 국가라면 받아야 될 사람을 빼 먹는(또는 아예 구조적으로 제외하는) 것도 명백하게 비정상이다. 국민을 위한 국가, 그리고 시민을 위한 정부는 이런 종류의 비정상을 정상화하는 일에 더 조바심을 낼 것 같다.
둘째,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도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 정상과 비정상 가르기는 한 사회가 가진 구조적 불평등을 그대로 반영할 때가 더 많다.
정부가 선정한 10대 분야 가운데 하나인 ‘정치, 사법, 노사분야 비생산적 관행 개선’이 이를 잘 보여준다. 말은 좋지만 ‘비생산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고 누가 정할 것인가. 과연 누구의 시각에서 본 효율과 생산성인가.
벌써부터 이런 식의 기준 정하기는 공기업의 ‘개혁’을 왜곡하는 핵심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노사분야의 비생산적 관행이라 했지만, 이런 표현은 미리 답을 정해 놓고 말을 돌리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정상과 비정상은 공공연하게 ‘그들’이 정한다.
그러고 보면, 보건의료의 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자칫 비정상적인 떼쓰기가 될 수 있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되고 시장에 맡겨진 상황에서, 그리고 대다수 기관이 민간인 형편에, 새삼 보건의료의 공공성을 찾는다? 통계나 다수결, 사회경제적 ‘주류’의 시각으로 보면 역시 비정상으로 몰리지 말란 법이 없다.
셋째,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다보면 현상에만 집중하고 본질과 근본은 뒤로 숨는다. 정부가 강조하는 국민의 눈높이와 체감이라는 표현이 이를 잘 나타낸다. 더구나 그 정상이 힘을 가지고 있을 때는 구조에 더 둔감해진다.
흔히 잘못된 시위 문화를 바로잡는다고 정상화를 말한다. 법치를 강조하는 말도 당연히 따라 붙는다. 그러나 정치체계와 의사결정의 민주주의라는 구조를 고려하지 않고 시위 문화의 정상화만 말하는 것은 본질을 비켜 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온갖 ‘비정상성’은 그냥 우연하게 생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전형적인 비정상이라 할 수 있는 홈리스는 철저하게 구조의 산물이다. 정상화가 관심을 쏟고 있는 부정과 부패, 범죄조차 체계와 구조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작지 않다.
또 한 가지, 푸코가 말하는 대로, 국가 권력이 정상을 규정함으로써 사회구성원들을 그 정상의 범위 안으로 몰아넣은 사회 ‘통제’ 기능도 주목해야 한다. 돈벌이 의료가 정상이 되면, 공공성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것은 곧 비정상이다. 다른 방식으로 보건의료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은 억압되고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규제를 둘러싼 지형도 비슷하다. 탈-규제가 정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 규제와 재-규제는 당연히 주변화 된다. 정상과 비정상을 규정하고 나눔으로써 규제 완화가 마땅한 규범으로 수용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국정의 프레임으로 정상화를 내세우는 것은 위험하다. 치우친 구조적 권력에 기초해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고 재단하며, 비정상의 이름으로 약자와 소수자를 배제할 가능성이 크다.
행정의 목표를 넘어 국정 철학이 된 다음에야 그 허구와 편파성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부지런히 문제의 심층 구조를 드러내고 끊임없이 대안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정상-비정상의 편 가르기에 맞장구를 칠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대다수 시민의 삶이 어떻게 좋아지고 나빠지는지, 결과와 그를 위한 목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정상화보다는 ‘인간화’가 더 중요한 사회적 결과이자 목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