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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공농성과 고용승계, 그리고 실업이 남기는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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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경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경북 구미의 한 공장 옥상 위, 높이 9m 철탑에서 600일 동안 농성을 이어온 사람이 있다. 한국옵티칼하이테크에서 정리해고된 노동자 박정혜씨다. 혹한과 폭염을 버티며 “고용승계”를 외쳤다. 단순한 일자리가 아니라, 정당하게 일할 권리와 존엄성을 지켜달라는 절규였다.

 

고용 승계는 단순한 노동권을 넘어 노동자의 건강과 직결된다. 실업이 노동자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해친다는 사실은 이미 수많은 연구와 현실이 증명해 왔다. 더 중요한 지점은, 일자리를 되찾을 때 비로소 무너진 건강이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박정혜씨가 요구한 ‘고용 승계’는 단순한 일자리 복귀가 아니라, 삶과 건강의 회복을 다시 가능케 하는 첫걸음이었다.

 

최근 국제학술지 ‘직업환경의학회지’에 게재된 한 연구에서는 1990년부터 2024년까지 전세계에서 발표된 38편의 종단 연구를 종합해 실업과 재취업이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논문 바로가기: 실업과 재취업이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

 

그 결과는 명확했다. 실업자는 고용 상태에 있는 사람보다 우울·불안·심리적 고통을 겪을 위험이 약 2배 높았다(RR=1.95). 증상 수준 역시 더 높았는데, 연구결과들을 단일 단위로 표준화하여 산출한 평균 차이(SMD=0.19) 결과는 실업이 건강 악화로 이어짐을 보여주었다.

 

반대로, 재취업은 정신건강 문제 위험을 약 3분의 1 줄였다(RR=0.66). 증상 수준도 감소해, 집단 간 비교에서는 SMD=−0.27, 집단 내 비교에서는 SMD=−0.19로 나타났다. 특히 한국 연구에서는 상대위험도(RR=0.27)가 매우 낮은 것으로 보고되어, 재취업 효과가 큰 것으로 드러났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일자리의 질이었다. 호주와 미국 연구는 양질의 안정된 일자리로 돌아간 경우에만 정신건강이 뚜렷하게 개선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반대로 불안정하고 열악한 일자리는 오히려 실업 상태보다 더 큰 해로움을 남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연구진은 모든 연구가 관찰연구였기 때문에 근거 수준을 ‘낮음’으로 평가했지만, 실업은 건강을 해치고 안정적 재취업은 회복의 조건이 된다는 사실은 일관되게 나타났다.

 

이 연구는 우리 사회에 분명한 메시지를 던진다. 실업은 우울과 불안, 심리적 고통을 높인다. 그러나 단순한 재취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안정적이고 질 높은 일자리야말로 진정한 회복의 열쇠다. 따라서 정책은 단순히 고용률 숫자를 높이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실업자에게는 상담과 치료 같은 정신건강 지원이 병행되어야 하고, 노동시장에는 안전하고 질 높은 일자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실업이 남긴 상처를 덜고, 재취업이 회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개별 노동자의 복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박정혜씨와 함께 투쟁한 노동자가 말했듯, “공장으로 돌아가도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공허감은 너무 클 것”이고, “그 당연한 권리를 되찾느라 진흙탕을 건넌 흔적도 영원히 지울 수 없다”(☞관련기사: 바로가기). 그렇기에 이 싸움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다.

 

과거에도 외국자본이 고용 안정을 저해할 경우 투자를 제한하고 정부가 시정 조처를 내리도록 하는 법안이 국회에 발의되었지만, 끝내 개정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당시 제안됐던 ‘외투기업 규제를 위한 패키지 법안’은 정리해고 시 과반수 노조 합의를 의무화하고, 기업 의사결정 과정에서 노조의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제도적 장치다.

 

600일 동안 평택, 서울, 일본 곳곳을 다니며 싸움을 알려온 이 투쟁은 이제 결실을 맺어야 한다. 더 이상 누군가가 옥상에 올라가 목숨을 걸고 외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고용 승계와 노동 존중이 당연한 제도로 자리 잡아야 한다.

 

*서지 정보

Sterud, T., et al. (2025). Mental health effects of unemployment and re-employment: a systematic review and meta-analysis of longitudinal studies. Occupational and Environmental Medicine, 82(7), 343-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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