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정치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다. 간단한 듯 보이나 어렵고 복잡하다. 마키아벨리가 처음으로 개념으로 만들었다고 했던가. 이후 많은 사람들이 설명하려 했지만 아직도 간단하지 않다. 개념치고는 썩 좋은 축에 끼지 못한다고 할까.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실체라는 점에서 현실은 다르다. 국가가 현실에 사용되는 방식은 매우 구체적이다. 예를 들어 국가보안법이라고 하면 어떤가. 이게 못마땅하면 국가보훈처나 국가장학금이라는 용법도 있다.
물론 현실이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국가 브랜드라는 말도 쓰이고, 최근에는 국가개조라는 말도 등장했다. 국가장학금과 국가 개조, 양쪽의 국가는 아무래도 느낌이 좀 다르다.
어찌되었든 일상의 국가 경험은 훨씬 더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과정을 거쳐 추상적인 개념과 이해가 만들어지긴 하지만, 그것은 현실과 분리될 수 없다. 국가는 추상적 이론이면서 동시에 구체적 행위자다.
예를 들어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의 폭력성을 경험한 사람이면 국가 폭력이란 말을 쉽게 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되풀이되면 폭력 국가라는 말이 실체를 얻게 된다. 보통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국가는 늘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이처럼 국가의 이론과 현실 경험을 되새기는 이유가 있다. 최근 우리 사회가 국가와 관련된 집단적 경험을 하고 있어서다. 바로 세월호 참사와 의료 영리화 정책이다. 다양한 성찰의 과제를 제기했고 아직도 진행형이나, 한 가지 핵심 질문을 돌아가기 어렵다. 우리에게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
세월호 참사는 두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거의 모든 국가 기관과 조직의 부실과 무능력이 100일이 넘게 낱낱이 생중계되고 있다. 꼭 능력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불성실하고 부도덕하다는 것이 더욱 한심하다.
피하려 해도 그 누구도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모든 사람들이 인식하고 해석하며 공유한다. 국가의 본질을 매개하는 하나의 집단 경험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숫자로 나타낼 것은 아니지만, 국가에 관한 한 한국전쟁 이후 가장 강력한 집단 경험이 아닌가 싶다.
조금 더 복잡하고 간접적이긴 하나 의료 영리화 정책도 비슷하다. 보통 사람들은 이 정책의 구체적인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 의료법인이니 영리 자법인이니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법인 약국이 어떻게 다른지 무슨 수로 아나.
이게 누굴 위한 정책인가 하는 질문이 훨씬 더 쉽다. 그러면 다들 답하는 것이 같다. 아무리 봐도 보통 사람들과 서민에게 도움이 되기는 애당초 글렀다. 맹장염이 천만 원이니 천 오백만원이니 하는 ‘괴담’이 되는 것이 바로 이런 대중의 이해와 해석을 반영한다. 이런 차원이면 이미 정책이 아니라 국가를 말하는 방식이다.
여기서도 사람들은 인식하고 해석하며 공유한다. 이런 국가는 도대체 어떤 국가이며 무엇을 하려는 국가인가. 세월호 참사보다는 훨씬 규모가 작고 직접적이지만, 우리는 또 다른 집단적 국가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세월호 참사와 의료 영리화 정책은 우연하게 결합되었다. 어차피 모든 경험이 구체적인 한, 그것 각각은 특수하다. 그러나 또한 국가를 공통적인 경험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통합적이다.
공통으로 발견할 수 있는 일차적인 경험은 혐오감이 아닌가 싶다. 세월호 참사에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의 반응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 때의 그 아득한 심정이란, 해도 해도 너무 한다고 할 때의 그 어둑한 느낌이란.
우리는 의료 영리화 정책도 대중적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고 본다. 국가 권력이 앞장서서 일부의 이익을 보장해 주려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한, 혐오를 피하기 어렵다. 어디서나 확인할 수 있는 수많은 댓글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글들!
물론, 국가에 대한 혐오감은 이제야 생긴 아주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들’로 표현되는 국가와의 분리, 그 중심에는 특히 권위주의적 국가의 억압과 폭력이 자리 잡고 있다. 오랫동안 국가는 피하거나 극복해야(또는 저항해야) 할 대상이었다.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권위주의 국가는 여전히 극복되지 않았다. 그리고 점점 더 약화되기는 하겠지만, 어떤 계기가 있을 때마다 국가는 다시 ‘그들’로 회귀하지 싶다. 혐오는 그 계기이자 동력이다.
국가와의 내면적 심리적 관련성은 혐오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의 원인과 밀접한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번에는 국가의 무력함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이유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에서 총체적 무능력 상태에 있는 국가를 보았다. 근대 국가가 만들어진 후 다른 어떤 때에도 이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슷한 사례가 없는 가장 강력한 경험일 터.
국가의 무능력이란 단지 기술적으로 실력과 해결 능력이 없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국가의 구성원(국민)을 보호하지 않는 것(또는 못하는 것) 그 자체를 뜻한다. 의도하든 아니든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의료 영리화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국가의 무능력(또는 부정적 능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국가는 ‘나’와 적대적인 것, 온건하게 이야기하더라도 완전한 ‘타자’가 되면서 ‘나’와 분리된다.
국가와 분리된 개인, 이제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무슨 방법으로? 바로 여기에서 다시 역사적 계기가 작용한다. 국가는 다른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아예 분리된 적이 없다. 다만 새로운 ‘통치’ 방식으로 바꾼 것일 뿐.
바로, 익숙한 신자유주의 통치 방식이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어법을 빌리자. 국가는 시장이 산출한 경제적 취약성과 불확실성에 대한 개입은 중단하는 대신, 특히 개인의 비경제적 취약성과 불확실성 속에서 역할을 추구한다. 신체, 재산, 주거의 위협을 ‘대안적 불안’으로 삼아 다른 모습으로 개입한다.
꼭 그대로는 아니다. ‘우리’의 국가는 경제적 취약성(예를 들어 의료 보장)에 개입을 채 중단하지 못하고, 한편 개인의 취약성에는 제대로 개입하지 못했다. 이유야 무엇이든 신자유주의적 국가 기획은 주춤거리고 있다.
당연히, 그 방향으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국가로의 기획은 더 강화될 것이 뻔하다. 민영화와 영리화, 규제 완화, 시장 기전의 강화는 국가에 대한 혐오를 먹고 자란다. 국가의 무능력과 부도덕이 힘을 보태는 것은 물론이다.
자본주의의 ‘간사한 지혜(간지, 奸智)’라고 해야 할까. 국가에서 분리되고자 하는 의지와 힘이 새로운 통치 방식이 실현되는 길을 닦는다. 신자유주의 통치 방식은 국가에 대한 혐오와 타자화를 통해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를 혐오하고 스스로를 분리하는 것,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 그건 간지에 말리는 것, 신자유주의의 통치에 투항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길이 있을 것인가.
힐러리 웨인라이트가 말하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다. 국가를 ‘되찾아야’ 한다(한국 상황에서는 ‘되찾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일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적 정치 경제의 목표는 정부의 등에서 민중들을 내리게 하는 것”이다. 국가를 되찾기 위해서는 “정부의 등에 다시 올라타는 새로운 방식들을 창조하고, 자원을 통제”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국가의 한 당사자인 “정치인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국가 공무원에 관한 좀 더 직접적인 통제력을 가짐으로써, 더욱 중요한 의미에서 국가에 바로 짓쳐들어간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국가 안에서 그리고 국가에 대항해(in and against the state)” “공공 서비스가 운영되는 방식을 급진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국가를 되찾자>, 김현우 옮김, 이매진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