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한국 사회가 ‘에볼라’에 대응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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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낯선 에볼라 바이러스가 온 세계를 패닉 상태에 몰아넣고 있다, 사실 서방 언론의 렌즈를 통한 것이라 ‘모든’ 나라는 아니다. 하지만 한국을 비롯해 많은 나라가 불안에 흔들리는 것은 사실일 터.

전문적이지만 몇 가지 사실은 이미 꽤 알려졌다. 우선, 세계보건기구가 ‘비상 상황’임을 선포했지만(사실 본래 뜻은 응급상황이다), 영화(예를 들어 아웃브레이크)나 드라마에서 묘사하듯 엄청난 재앙은 아닌 것 같다.

특히 에볼라는 혈액이나 체액으로 전염되기 때문에 공기를 통한 것보다는 덜 위험하다. 몇 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사스)’를 기억하시는지. 전형적으로 호흡기를 통해 전염되는 병이었다. 비교하자면 에볼라가 사스보다 대규모로 유행할 가능성이 훨씬 낮다.

새로 등장한 신종 전염병이 아니라는 점도 이젠 널리 알려진 정보다. 이미 30-40년간이나 중부 아프리카에서 유행하던 일종의 풍토병이란다. 그렇다면 그동안 예방이나 치료법이 왜 개발되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시장과 상품성이 모자랐던 결과니 누구 탓으로 돌려야 할까.

전염성은 비교적 낮지만 치명률은 높다. 병에 걸리면 일반적인 치료법(이른바 대증요법)을 쓰는 수밖에 없다. 치료제가 완성 직전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진행형이다. 쓸 수 있는 예방백신도 없으니 상황이 답답하다. 효과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대비는 전파를 막고 접촉을 하지 않는 것 정도다.

결국 지나치게 겁낼 필요가 없다는 것, 그리고 예방을 위해서는 확산을 막고 직접 접촉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정부의 방침이나 여러 언론들이 강조하는 것도 대체로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 과학으로는 여기까지다. 그러나 현실에서 나타나는 전염병은 또한 사회 현상이자 문제이기도 하다. 어쩌면 과학보다 사회적 반응이 현실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이를 살펴보고 교훈을 얻어야 할 참이다.

 

우선, 참 말하기 어려운 우리 안의 차별과 인종주의부터 보자. 사실 이미 엎질러진 물 신세다. 한 국제 행사에 아프리카 국가에서 온 사람들을 참가시킬 것인가를 두고 한바탕 소동이 났다. 결국 참석은 했지만 따로 재우고 일회용 식기를 쓰게 할 정도로 ‘격리’시켰다.

주최한 쪽은 한국 사람들의 항의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국내 참석 예정자는 두어 명만 남기고 모두 취소할 정도였다니, 이런 반응을 뭐라 해야 할까. 그냥 ‘위험’에 대비하는 차원이라기보다는 그 터무니없지만 끈질긴 차별의식과 행동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겠다.

단일 민족의 신화 때문인가, 피부색이나 나라를 두고 사람을 차별하는 악습을 비판한 것은 벌써 꽤 오랜 이야기다. 그래도 결혼이나 취업을 해서 살고 있는 이주자들에 대한 차별은 많이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직도 인권 침해는 끊이지 않고, 상황은 늘 아슬아슬하다.

비교해 보면 이번도 그냥 환자를 꺼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좀 더 명확해진다. 사스가 어디서 생겼다고 해서, 또는 올해 중동에서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때문에 몇 백 명이 죽었다고 해서, 이번처럼 그 지역 사람들을 대했다는 기억은 없다.

아프지만 대놓고 말하자. 2012년 한 해만 해도 미국에서 286명이 웨스트나일 바이러스 때문에 사망했다(영문판 위키피디아 참고). 그러나 이번에 아프리카 참석자들을 대접한 방식과 비슷한 것조차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피부색과 문화, 경제와 국제관계가 뒤섞인 복합적 차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분명 시대착오적이고 틀렸다. 앞으로도 에볼라 문제를 다루면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칠까 걱정스럽다.

 

둘째 이슈는 인권 문제이다. 굳이 전염병과 비전염병을 가릴 것은 없지만, 특히 에볼라와 같은 ‘불확실한’ 전염병에서는 인권 문제가 더 자주 제기된다. 가장 흔히 만나는 상황은 여행이나 접촉을 제한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번에도 한 선교 단체가 아프리카 지역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하려다가 취소했다. 사실 가려던 나라는 에볼라가 발생한 나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정부가 권고한데다(강제 조치는 아니었다) 비난 여론이 많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적극적인 권리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사회경제적 조건이나 지리적인 요소 때문에 형평성이 훼손되면 곤란하다. 특히 자원이나 재정이 부족할 때 배분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는 곧장 사회 정의의 문제로 넘어간다.

공익을 추구하면서도 최대한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이 늘 중립적인 것은 아니다. 누구의 것이든 마찬가지지만, 인권 역시 권력의 불균형 속에 있다는 점에서 특히 취약계층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크게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갔지만, 우리에게도 인권 딜레마의 경험이 이미 있다. 신종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강제로 격리시킨 조치를 취한 것이 한 가지 예다. 2009년에는 어떤 집단에게 먼저 신종플루 예방접종을 할 것인가도 문제가 되었다.

이번에 세계보건기구가 내놓은 에볼라 대책(바로 가기) 도 여러 측면에서 인권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 국민의 여행과 교역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것이 한 예다.

한국 내에서 에볼라를 예방하는 조치들의 일반원칙도 다를 바 없다. 에볼라의 유입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인권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좁고 내향적(內向的)인 관점의 문제. 꼭 한국만 그런 것은 아니다. 모든 나라가 예외 없이 내 나라로 유입되는가에 온 신경을 다 쓰고 있다. 조치나 정책도 당연히 그것이 초점이다.

크게 탓할 수 없다. 그러나 순전히 실용적으로도 에볼라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여러 나라 사이의 협업이 필요하다. 사람과 물건의 이동이 지금과 같은데 한 나라 국경 안에서만 최선을 다한다고 전염병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베스트팔렌적 국민 국가의 경계를 넘는 세계주의의 관점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가장 중요한 일은 현재의 유행을 빨리 끝내는 것이다. 냉정한 국제정치의 논리로 치면 각 나라 정부가 전염병을 통제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에볼라가 유행하는 서아프리카 국가들에게 모든 책임을 지울 수 없다. 사회경제적으로 매우 취약한데다 의료 시스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단기간에 자체 역량을 키우기 어렵다면, 국제기구를 포함한 국제적 협력이 필요하다. 인력이든 물자든, 또는 지식이나 재정이든, 여러 나라의 신속하고 충분한 지원이 문제 해결을 앞당길 수 있다. 한국의 에볼라 대책은 이것까지 포함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벌써부터 인도주의와 국제개발협력, 그리고 국격을 강조하지 않았던가.

질병 자체도 그렇지만 사회적 반응도 앞으로 경과가 어떨지 섣부르게 예측하기 어렵다. 장기 추세를 전망하는 일은 더욱 힘들다. 그러나 몇 십 년의 일을 볼 때 이 비슷한 일이 앞으로도 계속(또는 더 자주) 생길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에볼라에 대한 한국 사회의 대응에서 교훈을 더 얻어야 한다. 다름 아니라 이런 위험에 대비하는 일은 과학과 기술이면서 아울러 사회적, 역사적 조건에 좌우된다는 것. 옳고 좋은 삶을 만들어가려는 사회적 노력과 깊게 연결된다.

 

앞으로도 비슷한 도전들이 계속된다면, 기초를 넓게 잡아야 한다. 전지구적 관점에서는 물론이고 최소한 ‘국민’을 보호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도 행동 원리가 크게 확장되어야 할 터. “민족 국가의 경계를 넘는 보편적 인권과 건강권”이라는 고갱이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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