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014년 8월 13일 <건강렌즈로 본 사회> (바로가기)
과학소설에 등장할 법한 최첨단 진단 장비와 다국적 제약기업의 상호가 찍힌 알약을 보면 마음이 든든해진다. 반면 동네의원의 의사가 청진기 하나 달랑 들고 진료하면 마음이 불안하다. 심지어 약 처방도 해주지 않고 술이나 담배를 끊으라는 잔소리만 하는 의사라면 더욱 그렇다. 첨단 의학 기술일수록 질병 예방과 치료에 더 효과적이리라는 기대는 세계적으로 거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카를로스 스페인 나바라대학 교수팀은 지난 6월 국제 학술지인 <역학과 지역사회 건강>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런 생각을 망상이라고 일축했다. 연구팀은 폐암·자궁경부암을 비롯해 암이나 심장 및 혈관질환, 당뇨, 비만 등 대표적인 공중보건 문제와 관련한 기존의 연구 결과를 종합·검토했다. 몇 가지만 소개하면 우선 핏속 콜레스테롤 농도를 낮추는 스타틴이라는 약은 일부 심장 및 혈관질환자들한테 탁월한 효과를 보였다. 하지만 심장병이 없는 성인들에게 이를 예방할 목적으로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스타틴이라는 약은 임상 지침을 통해 점차 쓰임새가 넓어지고 있다. 심장병 발생의 80%가 식사습관·흡연·운동 같은 생활습관과 관련이 있음에도, 전체 성인의 거의 30%가 약을 먹게 해 질병을 예방한다는 것은 사실 난센스다.
메트포민이라는 약과 생활습관 개선이 당뇨 개선에 끼치는 효과를 비교한 결과도 인상적이다. 메트포민을 먹은 집단에서 3년, 10년 동안 당뇨 합병증의 발생 위험 감소 효과는 30%, 18%이다. 반면, 생활습관을 바꾼 집단의 효과는 각각 58%, 34%로 나타났다. 습관 개선이 약보다 월등하게 효과가 좋다.
자궁경부암 예방백신은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이 백신은 자궁경부암 문제가 덜 심각한 주요국의 중산층 이상에서 접종이 활발히 이뤄진다. 가격이 비싸서 발생하는 역설적 현상이다. 3번이나 맞아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이처럼 비싸고 번거로운 예방백신에 견줘, 콘돔 사용 등 안전한 성생활은 훨씬 효과적이고 비용도 적게 든다.
이른바 첨단 예방법은 사람들이 안전을 과신하게 만드는 부작용도 있다. 폐암 조기 검진을 꾸준히 받고 있으니 담배를 계속 피워도 괜찮다고 여기거나, 자궁경부암 백신을 맞았으니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 연구팀은 보건의료의 상업화 경향이 이런 기술 맹신 문화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며, 생활습관 개선과 공중보건 정책에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생활습관을 바꾸는 게 좋다는 것은 알지만, 그게 어려우니 약 등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게 아니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한 개인으로는 그럴 수 있지만 정책결정자라면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대중이 원한다며 복잡하고 값비싼 의학기술을 부추길 것이 아니라, 시민이 건강한 생활습관을 갖기 어렵게 만드는 조건은 무엇인지 연구하고 그 해결법을 찾아야 한다. 시민들한테 필요한 것은 정보기술(IT) 융합 또는 원격의료 같은 그럴싸한 이름의 첨단기술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건강한 생활습관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다.
김명희 시민건강증진연구소(health.re.kr)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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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 소개된 논문의 서지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Carlos S, de Irala J, Hanley M, Martinez-Gonzalez A. The use of expensive technologies instead of simple, sound, and effective lifestyle interventions: a perpetual delusion. J Epidemiol Community Health 2014 (online fir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