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반 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매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요즘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미생>이 장안의 화제이다. 드라마 속에서 그려지는 직장 내 풍경이 현실의 그것을 쏙 빼닮아서인지 시청자는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처지가 내 처지인양 울고 웃곤 한다.
며칠 전에는 계약직 사원 장그래의 눈물이 전파를 탔다. 같이 입사했지만 정규직이 되지 못한 장그래와 다른 입사 동기들의 처지는 그들이 받아 든 신년 선물의 차이만큼이나 커보였다. 어쩌면 현실은 더욱 가혹할지도 모른다. 영화 <카트> 속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은 대기업 계약직 사원 장그래의 눈물보다 더 절박해 보인다. 낮은 임금, 반복되는 단순 작업, 위험한 작업 환경은 그들의 차지이건만 그마저도 언제 중단될지 몰라 불안해하는 것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맞닥뜨린 현실이다.
노동 시장 유연화라는 미명하에 비정규직이 양산되는 것이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탈리아 또한 1990년대 이후 계약직 고용이 급증하였다고 한다. 이에 국제 학술 잡지 <사회과학과 의학> 최근호에 이탈리아 국민을 대상으로 고용 계약의 형태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Pirani & Salvini, 2015).
분석 결과를 보면, 비정규직 노동자의 경우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이 정규직 노동자보다 40% 가까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인들을 고려한 후의 결과로, 고용 계약 형태가 미친 순영향을 나타낸다.
그 간 실업이 건강, 특히 정신적 건강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는 많은 논문이 발표되었으나, 이 논문은 실업 뿐 아니라 계약직이라는 불안정한 고용 형태 또한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얘기한다. 불안정 고용과 건강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과거 국내 연구진에 의해서도 수행된 바 있는데(Kim, et al., 2008), 당시 연구에서도 불안정 고용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것으로 분석되었다.
연구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기간 계약직으로 종사하다 정규직으로 전환된 경우는 건강 상태에 별다른 영향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시간이 계속될 경우,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부정적이었으며, 정규직으로 종사하다 비정규직으로 전환된 경우 건강 상태에 미치는 영향이 더욱 부정적으로 나타났다.
성별에 따라서도 계약직 여부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달리 나타났는데, 비정규직 여부가 건강에 미친 영향은 여성에서 더 크게 나타났다. 여성의 경우 정규직 전환 가능성이 낮고, 직장에서의 업무 부담 외에 가사 노동도 감당해야 하는 이중 부담을 안고 있어 스트레스가 가중된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해석이다.
일반적으로 계약직은 정규직에 비해 더욱 열악한 작업 조건 하에서, 보다 단조로운 반복 업무에 종사할 가능성이 높고, 업무의 자율성도 부족하다. 업무에 대한 보상 수준도 낮으며, 각종 사내 복지 혜택에서도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대개의 경우는 승진을 기대할 수도 없으며, 노동조합 조직률도 낮아 부당한 처우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지도 못한다. 이러다 보니 업무 만족도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건강 상태도 나빠지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 여러 복지 정책과 사회 보장 제도로부터도 소외되는 경우가 많다.
불안정 고용이 건강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대체로 일관된 것으로 보이지만 상황에 따라 강화되기도 하고 약화되기도 한다. 가령, 스칸디나비아 국가(특히 핀란드)에서는 계약직이라고 해서 더 건강 상태가 나쁘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Virtanen, et al., 2003).
이는 불안정 고용이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사회 보장 제도를 통해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 따르는 불안을 완화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물론 임금 인상 등을 통해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차이를 줄이는 노력과 비정규직의 권리를 옹호하고 작업장 내 권력 관계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장치, 양성 평등을 위한 노력 또한 건강 악영향을 완화하기 위해 필요하다.
다시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면, 지난 12월 1일 박근혜 대통령이 정규직에 대한 정리 해고 요건 완화를 골자로 한 노동 개혁을 주문하였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기획재정부가 ‘기간제 중규직’을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언론 보도가 있기도 하였다(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잘못 보도된 내용이라는 기획재정부의 반박이 있었다).
답답한 것은 이러한 시도들이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포장된다는 것이다. 중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고용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중규직 신설은 더 많은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정규직의 고용 상태 또한 불안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따름이다.
불안정한 취업 상태가 노동자 건강에 미칠 영향을 생각했을 때 해고할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얻을 것은 무엇이며, 잃을 것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배은영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원
참고 자료
Pirani, E., Salvini, S. Is temporary employment damaging to health? A longitudinal study on Italian workers. Social Science & Medicine 2015;124:121-131.
Kim, M.H., Kim, C.Y., Park, J.K., Kawachi, I. Is precarious employment damaging to self-rated health? Results of propensity score methods using longitudinal data in South Korea. Social Science & ?Medicine 2008;67:1982-1994.
Virtanen, P., Liukkonen, V., Vahtera, J., Kivimaki, M., Koskenvuo, M. Health inequalities in the workforce: the labour market core-periphery structure. International Journal of Epidemiology 2003;32(6):1015-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