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평으로 올해를 마무리한다. 어느 날인들 평범하지 않지만, 2014년은 4월의 세월호 참사로 특별히 기억될 것이다. 많은 것이 드러났고, 끝 모르게 좌절했으며, 그만큼 또 숱한 반성거리를 남겼다. 한 해의 끝에 다시 다짐해야 할 말은, 그렇다 세월호를 잊지 말아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할 일은 그뿐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사고’는 올해를 정리하는 요약이자 키워드다. 2월 17일 경주 리조트가 무너져 백 명이 넘는 사상자가 났다. 헬기가 떨어졌고, 버스 터미널에 큰 불이 난 것도 올해다.
군대는 총기 사고와 폭력으로 얼룩졌고, 대형 산재 사고가 끊이지 않았으며, 의료 사고까지 빠지지 않는다. 판교에서는 환풍구가 무너졌고, 외국 바다에서 조업하던 배가 침몰한 것도 잊을 수 없다.
많은 사고가 났고 아까운 목숨들이 스러졌다. 결코 우연이나 불운이 아니다. 낡아 빠진 앙시앵 레짐(구체제)과 개발 독재, 그 위에 겹겹이 쌓인 반(反)인간의 돈과 시장 만능 체제, 그 희생자들이 울리는 노골적인 경고다.
2014년의 첫 논평에서 우리는 민주와 복지, 공공의 회복을 말했다 (서리풀 논평, 프레시안 바로가기). 희망찬 기운으로 새해를 맞자는 뜻을 왜 담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 희망은 현실의 어두움에서 싹 틔우고 자란 것,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위협받고 후퇴할 가능성이 컸다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걱정은 꼭 들어맞았다. 민주와 복지, 공공은 일 년 만에 더 위축되었다. 더 노골적이고 염치가 없어졌으며 남은 눈치마저 보지 않는다. 곧 맞을 새해, 형식적인 희망조차 고사될까 걱정스럽다.
민주주의를 생각하고 살아낼 공간은 더욱 쪼그라들었다. 경제 민주화는 감히 꿈조차 꿀 수 없다. 2014년 내내 ‘실질적’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의심해야 했다. 그동안 진전이 있었다고 말하던 형식과 절차의 민주도 장담하지 못하게 후퇴했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12월 헌재의 정당해산 심판은 허약한 민주주의가 드러내는 대표적 징후일 뿐이다. 며칠 전 서울의 홍대 앞에서 대통령을 비난하는 전단지가 뿌려졌다는 것에서 더 많은 것을 감지한다. 시대를 거스르는 그 ‘복고적’ 형식이란. 구시대의 ‘유령’이 부활하는 조짐을 역설적으로 상징한다.
민주주의의 실질을 말하기는 낯간지럽다. 평범한 사람들의 뜻을 반영하는 대의 기구가 작동한다는 어떤 증거도 찾기 어렵다. 대의 민주주의는 빈사 상태이고, 정책을 다루는 행정부의 독단과 전횡은 20년 전으로 되돌아갔다고 할 정도다. 이상한 ‘문건’ 논란에서 보듯 근대적 합리성조차 위기를 맞고 있다.
이 마당에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 말도 꺼내기 어렵다. 재벌과 대기업을 보살피는 데는 법도 가볍지만, 영세 상인, 비정규직, 정리 해고, 빈곤층, 장애인에는 그렇게 가혹할 수 없다. 이들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배제하는 곳을 그래도 민주 사회라고 불러야 할까.
복지는 더 후퇴했다. 경제와 정부 재정이 좋은 빌미다. 공약 파기는 이제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나마 뿌리를 내리려던 것조차 흔드는 것, 2014년 진행된 복지 정치의 특성이다.
안전과 건강, 복지를 ‘경제화’하는 것은 더 나갔다. 담뱃값을 올리면서 건강을 핑계로 삼았지만, 결국은 재정 대책임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복지를 수입과 지출의 게임으로 만든 것이 담뱃값 소동의 중요한 소득이랄까. 모든 복지를 경제의 틀로 통일한 효과를 거뒀다.
복지의 경제화는 정치로 완성된다. 급식과 보육을 둘러싼 ‘분할’의 복지 정치가 대표적인 예. 선별과 우선순위라는 이름으로 대상을 나누었고, 결국 이해관계의 각축으로 바꾸어냈다. 주어진 재정 안에서 배분하고 경쟁하게 하는 분할의 복지 통치를 시작한 셈이다.
공공성에 대한 공격이 두드러지는 한 해였다. 일 년 내내 의료 산업과 영리화를 밀어붙인 것을 잊을 수 없다. 얼마나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지는 절로 드러났지만 동력은 줄지 않았다.
시작은 규제 완화였다. 전쟁이라는 은유와 끝장 토론이라는 이벤트를 동원했고, 모든 공중파 방송국이 나서서 월드컵 축구 중계를 흉내 낸 것을 기억한다.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한다) 2014년 3월 20일의 일이다. 그리고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세월호가 물에 잠겼고 3백 명이 넘게 희생되었다.
세월호 참사가 드러낸 것은 국가의 무능과 부패였지만, 이는 곧 규제의 무능과 부패와 다르지 않다. 무엇이라 표현하든 어떤 핑계를 대든, 무능하고 부패한 규제 완화가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광풍’은 에너지가 다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포기한 것 같지는 않다. 신의료기술 평가를 완화하겠다는 11월 말 보건복지부의 발표만 봐도 그렇다. 경제와 투자 활성화라는 명분, 그리고 행정과 관료주의의 합작품이다.
후반기에는 공공부문과 노동시장 ‘개혁’까지 보태졌다. 고임금과 성과급, 복지, 도덕적 해이 등의 공격은 공무원 연금 개혁까지 나아갔고, 비정규직 문제는 정규직 공격이라는 또 다른 분할의 정치와 통치로 진화했다.
요컨대 국가와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원리는 더 강해졌다. 그에 반응하는 개인의 내면도 따라서 다져졌다. 우리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게다가 국가에 대한 혐오는 어느 때보다 커졌다. 국가와 현실 정치의 무능과 부패가 힘을 보탠 결과다.
돌아보니 2014년을 마무리하는 심정은 뿌듯함과 보람보다는 좌절과 소진에 가깝다. 그토록 거친 공격 속에서 사람다운 삶에 대한 의지를 간직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 삶이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또 얼마나 힘든가. 그러니 냉소와 혐오(이 역시 내부와 외부 구분 없는)로 가기 쉽다.
그래도, 어떻게 희망의 불씨를 살릴까 묻는다. 우리 각자의 몫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어떤 철학자의 말을 빌리면 ‘억압’과 ‘억제’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가 문제다. 우리 스스로의 생각과 삶의 양식을 변화, 변용시켜 나가는 것과 관련된다.
또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00일쯤 되었을 때 발표한 논평도 여전히 유효하다 (서리풀 논평, 프레시안 바로가기). 국가를 혐오하고 사회로부터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게서 분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통치에 투항하는 것이다. 국가를 ‘찾고’ 또 ‘되찾아야’ 한다.
힐러리 웨인라이트의 주장을 다시 들어보자.
“신자유주의적 정치 경제의 목표는 정부의 등에서 민중들을 내리게 하는 것”이다. 국가를 되찾기 위해서는 “정부의 등에 다시 올라타는 새로운 방식들을 창조하고, 자원을 통제”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국가의 한 당사자인 “정치인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국가 공무원에 관한 좀 더 직접적인 통제력을 가짐으로써, 더욱 중요한 의미에서 국가에 바로 짓쳐들어간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국가 안에서 그리고 국가에 대항해(in and against the state)” “공공 서비스가 운영되는 방식을 급진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국가를 되찾자>, 김현우 옮김, 이매진 펴냄)
서리풀 논평의 모든 독자들께, 머리 숙여 인사를 올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그리고 새로운 희망으로 2015년을 맞으시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