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 두 달도 지나지 않았다. 예산 때문에 급식과 보육 두 가지 가운데에 선택해야 할 것 같았던 것이 바로 얼마 전이다. 교육부가 급식 예산을 보육 예산으로 돌려쓰도록 한 데서 출발한 갈등이었다.
급식과 보육 가운데 고를 것을 강요하는 복지 정치를 우리는 ‘분할 통치’라고 표현했다(서리풀 논평 바로가기, 프레시안 바로가기). 그리고 여기에는 복지 재정을 둘러싼 복지 망국론과 또한 선별 복지의 프레임이 연결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분할 통치의 뜻은 사전에 나와 있다. 전체가 아니라 일부를 골라서 혜택을 주고(‘분할’), 나머지는 억압하거나 서로 갈등하게 만든다(‘통치’). 이를 통해 권력의 수직 관계는 수평적인 상호 관계로 바뀐다.
걱정하던 대로 복지와 보건의료를 둘러싼 분할 통치는 빠른 속도로 진전되고 있다. 가속기 노릇을 하는 것이 최근 일어난 어린이집 폭행 사건이다. 보편 복지로서의 보육이 아니라, 이리 저리 집단이 나뉘어 서로 다투는 ‘전쟁터’로 바뀌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사실 지금도 전업주부들이 아이들을 12시간 내내 어린이집에 맡기는 경우는 드물다”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필요한 시간에 잠깐 아이를 봐주는 시설인 만큼 시간제 보육을 활성화하고, 전일 보육은 정말 서비스가 필요한 맞벌이 부부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게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합뉴스 기사 바로가기)
이 일이 가장 최근에 불거진 것이다. 첫째 갈등은 누가 혜택을 볼 것인가 하는 것. 보건복지부 장관이 말했다는 “불필요한 보육시설 이용 수요”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하다. 겉으로는 보육의 질이나 양육수당의 현실화 같은 보육 정책의 개선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불필요’라고 말함으로써 되돌릴 수 없이 수요의 종류와 대상자를 나누어 버렸다. 우리는 이 말이 실수가 아니라 의도된 것이라고 본다. 아니나 다를까 교육부도 “가정보육 지원 확대” “어린이집 이용 줄이기” 등을 내세우면서 이런 흐름에 가세했다.
행정 용어로 치장했지만 노리는 것은 명확하다. 전업 주부와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나누어 이익을 경쟁하는 상태로 만들었다. 한 가지 더, ‘불필요’하다고 규정해 윤리와 도덕의 문제까지 보탰다.
보육을 둘러싼 분할은 한 가지 대치선이 더 있다. 어린이집과 아이들의 부모가 반목과 갈등의 두 당사자가 된 것이다. 지금 보육 서비스가 안고 있는 문제가 그리 단순할 리 없다. 교사와 원장의 개인 문제부터 국가 재정과 인력 양성 체계에 이르기까지, 가로 세로로 많은 일들이 난마처럼 얽혀있다.
그러나 초점은 어느새 어린이집과 부모 양자로 굳어졌다. CCTV, 교사의 자질 향상, 어린이 집의 규제, 가정 보육 확대 등등. 서비스 수요자와 공급자 사이의 긴장과 이해 상충이 전체를 관통한다. 전형적인 분할, 그리고 통치다.
마침 보육만 그런 것이 아니다. 연말 정산을 둘러싼 난맥상에도 비슷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사실 소득에 따른 세금은 복지와 증세를 둘러싼 집단 사이의 이해관계로 바뀐 지 오래다. 분할은 여기서 더 나아가 갖가지로 또 은밀하게 작동한다.
분할 통치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성 가운데 하나가 권력 행사 – 분할의 자의성이다. 기준이나 근거는 합리성이 아니라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가에 따라 동원된다. 하루아침에 없어졌다 또 되살아나는 공제 항목을 보라.
독신 근로자, 다자녀, 출산, 연금보험, 교육비와 의료비 등, 세금은 어떤 조건에 맞는 사람들(집단)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다른 집단) 사이에 벌어지는 경쟁을 만들어낸다. “그럼 나(우리)는?” “왜 저들에게만?‘ 이라고 묻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분할을 통한 통치는 보건의료에서도 드문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한정된 보건의료 재정을 어디에 쓸 것인가가 힘의 원천으로 작용했다. 병원과 동네 의원, 대학 병원과 중소 병원, 전문 분야별, 의사와 약사, 의사와 한의사 등등, 이해관계를 나누는 단층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직종 간에 또는 전문 영역 사이에만 이런 일이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 위험한 중병도 아닌데 병의원을 너무 많이 가는” 사람들에 대한 불만, 아직 건강보험 혜택을 못 받는 신약이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여기에 누가 보험료를 얼마나 더 많이 내야 하나가 추가된다. 점점 더 이익과 손해를 따지게 만들고, 또 그렇게 맞추어 갈 것이다.
분할의 예는 더 많지만 이 정도로 줄인다. 사실 같은 맥락에서 만들어진, 모양이 다른 사례일 뿐이다. 어느 것이든 통치는 설득력 있는 조건 속에서 싹이 트고 자란다. 조건이 달라지지 않으면 앞으로 더 많은 비슷한 시도들을 보게 될 것이다.
지금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당연히 돈의 문제다. 복지 망국, 재정 파탄, 노령화의 재앙 등. 우리 힘으로 모든 복지 수요와 재정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도 도전하지 못하는 정설이 되었다.
또 한 가지, 기술과 실무의 이름으로 ‘자원배분’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강력하게 작동한다. 쓸 돈이 정해져 있으니, 우선순위와 대상을 골라야 한다는 것이 핵심 논리다. 그러니 선별은 피할 수 없다!
급식과 보육 중에, 시설과 지역 사회 가운데에, 더 중요하고 급한 것을 나누어야 한다. 새로운 항암제와 입원 환자의 식대 사이에서도 선택은 불가피하다. 보편 복지는 단지 어리석음이나 선동으로 치부된다.
통치가 가능하려면 조건에 맞추어 “훈육된 국민”도 필요하다. 우선, 서로 나뉜 사이에서 이해관계가 직접 격돌하고 깊은 이유와 구조에는 무심해야 한다. 한정된 자원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누가 어떤 방식으로 한정했는가는 좀처럼 묻지 않는다. 국방과 사회간접자본, 4대강과 자원외교 등과의 배분은 문제로 삼지 않는 것이다.
비판과 시비는 당연히 개별화된다. 복지 재정이 빈약해서 생기는 문제도, 공격의 화살은 ‘도덕적 해이’로 향한다. 통치의 관점에서는 국가의 책임이 아니라 어떤 직종, 기관, 개인, 그것의 일탈이어야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한 가지가 더. 분할이 힘을 얻으려면 윤리와 도덕의 논리, 정신과 이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특히 복지와 보건의료처럼 이익과 손해를 사회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경우는 더하다. 가정, 자기 책임, 공동체와 같은 익숙한 가치에, 우리 사회는 국가주의의 정신까지 시퍼렇게 살아있다.
나누고 선택해야 할 일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통치를 뒷받침하는 조건은 더욱 공공해질 터이니, 다만 주어진 파이를 힘써 다투는 쪽으로 갈 일이 걱정스럽다. 출발이 그것이 아닌데, 복지가 거대한 갈등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분할의 통치를 무너뜨리는 방법은 일차적으로 이 시기 ‘국가이성’이 의도하는 대로 나눠지지 않는 것이다. 전업주부와 맞벌이, 그리고 어린이집과 부모가 한 단계 더 깊은 곳에서 답을 찾아 연대해야 한다. 내 세금은(또는 내 세금도) 줄여달라는 주장을 넘어, 조세 정의와 복지 재정 확충을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계획한 대로 통치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