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건강보험이 흑자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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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는 ‘보고서’가 많다. 한국 사람들도 많이 아는 <베버리지 보고서>는 영국 복지제도의 기초를 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1980년 영국 보건부가 내놓은 <블랙 리포트>도 그런 보고서 가운데 하나다.

(순전히 짐작이지만) 이 보고서가 유명해진 데에는 이름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블랙’ 리포트라면 백서나 청서 식으로 책 표지의 색깔이 검정색인가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름은 책임을 맡은 위원장의 이름(더글러스 블랙)에서 따왔다.

이 보고서 출간을 둘러싼 영국 정치는 또 다른 이야기 거리지만, 오늘은 내용에만 집중한다. 긴 보고서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사회 계층과 지역, 성별에 따라 심각한 건강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보고서). 현재까지 지속되는 건강 불평등 논의의 시초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결론이지만, 당시에는 충격이 꽤 컸다. 영국 정부가 보고서 발간을 끝까지 미루다 할 수 없이 260부만 찍었다는 것이 사정의 일단을 말한다.

충분히 놀랄 만했다. 당시는 영국의 ‘국영의료시스템’(영어로는 National Health Service, 줄여서 NHS라고 부른다)이 출범하고 30년이 지났을 때다. 모든 사람이 (계급과 계층에 무관하게) 경제적 부담 없이 병원과 의원을 이용할 수 있게 한다고 했던, 그들로서는 세계에 자랑했던 제도였다. 그런데 죽음과 질병의 불평등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는 것이 결론이었으니.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 제도의 실패를 말했다. 건강은 의료 말고도 여러 이유가 있으니 그렇다 치고, ‘무상’의료를 내세웠는데 의료이용의 불평등도 해소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이 보고서는 국가의료시스템의 한계를 교훈으로 남겼다.

 

새삼 다른 나라가 실패했는지 아닌지를 따지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40년이 더 지난 외국의 보고서를 떠올린 이유가 있다. 최근 국민건강보험(이하 ‘건강보험’으로 부른다)의 흑자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블랙 리포트>와 건강보험 흑자가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물을 수 있다.

제도 자체의 건전성과 궁극적 가치 사이에 불일치와 긴장관계가 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블랙 리포트>의 결과에 놀랐다면 그것은 국영의료시스템의 내부만 보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건강보험이 내부적으로 흑자(그리고 그것이 뜻하는 현실)라고 해서 건강보험이 성공이다 실패다 말할 수 없다.

 

건강보험이 궁극으로는 건강과 수명을 지향한다면 문제는 더 복잡하다. 따지고 보면 사망과 질병이 생기는 것 자체가 건강보험을 훌쩍 뛰어넘는 문제가 아닌가. 그보다 범위를 좁혀서 (건강과 생명의 수단인) 의료 서비스에 한정해도 비슷하다.

건강보험은 환자가 병원이나 의원을 찾아온 다음에야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한다. 건강보험에 들어오기 이전과 나간 이후의 보건의료는 알 길이 없다. 너무 먼 길을 와야 병의원이 있는 가난한 농부라면 그에게 건강보험 흑자란 무슨 의미일까.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공단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4년 한 해 동안 건강보험은 약 4조 6천억 원 흑자를 봤다고 한다 (보도자료). ‘관리운영’이나 ‘재정 수지’처럼 건조하게 표현하면, 건강보험은 전에 없이 건전하고 성공적이라 할 만하다.

직접 이유는 지출(급여비)이 증가하는 속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2005년에서 2011년 사이의 연평균 증가율은 12.0%였으나 최근 3년(2012-14년)의 연평균 증가율은 5.5%에 지나지 않는다. 외래와 약국보다는 입원 지출의 증가율이 더 낮다. 입원 진료비가 덜 늘어난 데에는 환자 1인당 진료비, 입원일수, 입원 1일당 진료비가 모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정부는 이런 건전성의 원인을 찾느라 열심이다. 보도자료에는 건강보험 지출이 둔화된 원인으로 건강행태 변화, 의료기술 발전, 환경요인 개선, 건강한 고령화 등을 지적했다. 이런 것만 이유라면 대체로 좋은 변화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장기적인 변화가 있어야 가능한 일인데, 선뜻 동의할 근거를 찾기 어렵다.

백 걸음을 양보해도, 재정의 건전성은 건강보험의 내부 이야기일 뿐이다. 바깥에서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근거는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건강보험 재정과 달리, 가계 지출에서 보건의료비의 비중이 계속 늘어나는 것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한국은행이 발표하는 가계의 목적별 최종 소비지출을 직접 계산해 봤다 (국가통계포털 바로가기). 지출에서 보건의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2008년 대략 4.0% 수준에서 2012년 3/4분기 4.8%, 2013년 3/4분기 5.0%, 2014년 3/4분기 5.3% 수준으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비중이 커진 것은 보건의료비 증가가 전체 지출 증가에 비해 빠르기 때문이다. 2012년 1/4분기와 2/4분기 사이, 2013년 1/4분기와 2/4분기 사이, 2014년 1/4분기와 2/4분기 사이가 더 두드러진다. 전체 소비지출은 그 이전 분기에 비해 (증가율이 아니라) 실제 지출이 감소했지만 보건의료비의 비중은 계속 늘어났다.

건강보험 지출 규모와 가계 소비의 보건의료비 지출이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지는 좀 더 자세하게 분석해 봐야 한다. 하지만 그냥 넘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요컨대, 건강보험의 지출 증가는 둔화되었는데 가계 소비의 보건의료비 비중은 더 늘어났다.

 

단순하게 보자. 건강보험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가계의 보건의료비 지출 비중은 억제되어야 한다 (감소까지는 몰라도 현상 유지는 해야 앞뒤가 맞는다). 그렇지 않고 빠른 속도로 늘어난다면 이유가 무엇이든 문제가 있다. 그 정도가 심하면 건강보험의 ‘실패’조차 부인할 수 없게 된다.

확실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의료비 지출이 꾸준히 그리고 가파르게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건강보험보다는 가계 지출의 부담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것이 이런 추세를 대변한다. 건강보험 재정과 가계 의료비 지출의 다른 경향이 왜 나타나는지, 정부는 좀 더 상세하게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임시로 몇 가지 이유를 댈 수 있다. 하나는 건강보험에 해당하지 않는 병의원 이용이 많아졌을 가능성이다. 여기에는 성형수술이나 미용처럼 의학적인 필요성이 떨어지는 항목의 지출 증가가 포함된다. 그러나 이것은 앞서 말한 “어쩔 수 없는” 의료비의 범위에 들지 않는다. 경제가 어렵고 소비지출의 증가가 둔화되면 같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 다음은 꼭 필요한데도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 이때도 할 수 없이 직접 의료비 부담이 늘어난다. 새로운 약이나 기술, 재료를 포함해서 이른바 건강보험의 ‘비급여’가 여기에 해당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낮아서 생기는 일이다.

병의원을 덜 가는 대신, 건강보험에 해당하지 않는 보건의료에 의존하는 것이 또 다른 가능성으로 남는다. 건강보험 대신 약국에서 매약으로 해결하면 계산이 이리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비용이 그 정도로 클까 의심스럽다.

 

결과에 이르는 경로는 서로 달라도 결국 건강이나 의료가 아니라 경제 사정이 가장 크게 작용한 것 아닌가 짐작한다. 질병관리본부가 2014년 10월 발표한 <2013년 국민건강영양조사> 결과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필요한데도 병의원을 가지 못한 사람의 비율은 계속 줄어드는 가운데서도, 경제적 이유(“비용을 부담하기 힘들어서”)는 2010년 이후 계속 늘어나고 있다 (보도자료). 특히 입원 진료비 증가율이 낮은 것이 예사롭지 않다(경제적 이유라면 그 정도가 더 심하다는 뜻이다).

 

또 다른 이유들은 좀 더 종합적인 분석을 해야 명확해질 것이다. 다만, 한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건강보험의 재정 흑자는 가계의 더 많은 의료비 지출을 뜻한다. 건강보험의 본래 취지를 생각하면, 재정의 건전성이 건강보험의 건전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보장성을 확대하는 것이든 본인 부담률을 줄이는 방법이든, 가계 부담을 낮추려면 건강보험이 더 많이 떠맡아야 한다. 그것이 건강보험이 지향해야 할 가치이고 존재의 의의가 아니던가. 경제 사정이 어렵고 소비의 여력이 줄어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한 가지를 더 보탠다. 이런 사정들은 사람마다 가족마다 형편이 다르다. 의료비 지출은 어떤 사람들에게 더 큰 부담일까, 뻔한 물음과 답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건강보험 흑자의 뒤에는 살림살이가 어려운 이들의 고통이 그만큼 숨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재정의 건전성이 아니라 건강보험의 건전성이 먼저다. 건강보험 흑자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는 기준도 달리 찾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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