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격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프레시안 기사 바로가기)
치열한 경쟁사회
무슨 무슨 사회라고 부르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버린 모양이지만 한국 사회를 ‘경쟁 사회’라고 설명하는 것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유치원 입시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이미 유치원에 등록하는 것부터가 전쟁이고 상대적으로 높은 점수를 받아야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 경쟁 구도 속에서 학교 친구는 같이 학교생활을 하는 동료가 아닌 경쟁 상대일 뿐이다. 이는 다시 입시경쟁으로, 그리고 부족한 일자리를 두고 벌이는 스펙 경쟁과 취업 경쟁을 거쳐 수많은 회사원들과 자영업자들의 생존 경쟁으로 이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좀 팍팍하긴 한데,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어? 경쟁은 태곳적부터 부족한 자원을 둘러싼 인간의 본성이자 보다 효율성을 높이고 개인역량 증진을 위해 필수적인 것 아닌가!’ 아니, 잠깐. 정말 어쩔 수 없나? 경쟁이 인간의 본성인지, 개인과 사회의 발전에 필수적인지에 대한 갑론을박은 일단 접어두기로 하고, 경쟁과 건강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가 최근 발표되어 소개하려고 한다.
<사회과학과 의학(Social Science & Medicine)> 최신호에 실린 이 논문은 19세기에 태어난 음악 작곡가들 간의 동료 경쟁이 조기 사망에 미친 영향을 다루고 있는데 이름 있는 144명의 작곡가들이 같은 시간대에 같은 지역에서 얼마나 많이 활동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활동 기간을 공유했는지 등을 경쟁 지표로 두고 이것과 수명의 연관성을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는 놀라울 만큼 일관되었다. 한 작곡가가 사는 동안 같은 도시에 사는 작곡가가 한 명 늘 때마다 수명은 평균 2.2년 감소했으며, 동일 장소, 동일 시기를 공유한 작곡가들의 평균 인구 비율이 1% 증가할 때마다 수명은 5.9주씩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만일 그가 파리나 빈과 같은 저명 음악 도시에서 지내야 했다면 체류 기간 1년당 무려 6개월의 수명 감소를 감내해야 했다고 밝히고 있다. 아울러 동료 작곡가들의 성취 점수가 1점 증가할 때마다 수명은 2.6개월씩 감소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효과가 개인의 자질이나 배경에 관계없이 일관되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결과가 발생한 것일까? 19세기 후반, 음악 인프라가 풍부해지고 중산층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작곡가들의 활동 기반이 증가하였음에도, 당시의 교통과 통신 수준으로는 제한된 지리적 영역 내에서만 음악이 생산되고 소비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한정된 공연장에서 본인의 곡을 공연하고자 하는 작곡가들 사이에 경쟁이 있었고 동료 작곡가들에게 주목받지 못하고 동료들 사이에 인지도가 떨어진다는 불안,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추가적인 스트레스가 지속적으로 작곡가들을 괴롭혔을 것이다.
연구자들은 그런 재능의 시간적·공간적 집중이 결국 지속적인 정신적 긴장을 유발하고 작곡가들을 더욱 가혹한 상태로 몰아넣음으로써 이들의 건강과 안녕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도전과 활력이 되지만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심혈관 질환의 위험을 높이는 등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여러 실험과 연구를 통해 이미 잘 알려져 있다(조정진, 2013). 즉, 이 연구는 경쟁이 자원 할당과 경제적 이익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개인의 건강과 안녕에 무시하기 어려운 정도의 부정적인 외부 효과를 가진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 상영된 영화 <위플래쉬>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지휘자가 메인 드럼 연주자 자리를 놓고 학생들을 몰아붙여 살벌한 경쟁 속에 집어넣는데, 그 덕분에 주인공의 실력이 발전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은 신체적·정신적으로 망가지고 만다. (물론 영화에서 시사하는 바가 꼭 이것 뿐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노동자로, 자영업자로, 학생으로 사회에서 내몰리는 경쟁은 명성보다는 생존을 위한 것에 더욱 가깝기 때문에 조금 더 슬프다. 뻔히 눈에 보이는 거리에 치킨 가게, 카페, 편의점은 물론이고 병·의원이 넘쳐나는 상황에 경쟁과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배짱 좋은 이는 거의 없다. 밟지 않으면 밟힌다는 다소 살벌한 명제가 뇌리를 스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잠시 숨을 고르고 우리가 직면한 경쟁 사회에서 경쟁이 정말 필수적인 것인지 의문을 가져보는 방법도 있다. <팔꿈치 사회>(갈라파고스 펴냄)에서 강수돌 교수는 오늘날 사회가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경쟁을 당연하고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인식하게 하고 이를 내면화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자본의 지배를 손쉽게 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이야기 한다. (☞관련 기사 : 늘어나는 청소년 자살…’팔꿈치 좀 그만 휘둘러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스스로를 개발하고 뛰게 하는 경쟁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가 사람들을 통치하는 중요한 기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군비 경쟁과 같이 누구나 갖추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 쉽사리 내려놓지 못하는 상대적 경쟁의 폐해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경쟁으로 지친 우리네 삶이 조금 더 나아지려면 단순히 힐링을 소비하기보다는 경쟁 자체에 대해 조금은 더 비판적인 시각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참고 자료
Borowiecki, K. J., & Kavetsos, G. (2015). In fatal pursuit of immortal fame: Peer competition and early mortality of music composers. Social Science & Medicine, 134, 30-42.
Cho, J. J. (2013). 스트레스와 심혈관질환. J Korean Med Assoc, 56(6), 462-4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