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연금을 ‘개혁’하자는 여야협상이 논란만 키우고 결말을 보지 못했다. 정말 청와대 한 마디에 그렇게 되었는지, 그 난맥상이 말로 다하기 어렵다. 다만, 공적 연금에 대한 믿음이 더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이 안타깝다.
불은 국민연금으로 옮겨 붙었다. 공무원연금을 바꾸면서 절감한 재정을 국민연금에 지원한다는 대목에서 걸린 것이다. 정치적 협상에서 이 말이 나온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공적 연금이 골고루 충실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한다면 그 취지만큼은 반대하기 어렵다.
국민연금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 이런 논의로 진전되었으면 가장 바람직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득대체율 50%를 둘러싼 논쟁도 부정적으로 볼 일이 아니다. 곧 닥칠 노인 빈곤과 불평등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도 국민연금의 보장성 문제는 다시 검토해야 마땅하다.
우리는 공적 연금을 강화하는 여러 대안들에 관심이 있지만, 여기서 구체적인 방안에 대한 의견을 낼 참은 아니다. 그보다 오늘 논평은 강제로 불려 나온 국민연금 논의가 자칫 사회적 연대를 위협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논란의 출발은 모두가 아는 대로 소득대체율 50% 그리고 이에 대한 정부의 태도다. 지금의 40%에서 50%로 대체율을 올리기 위해서는 당연히 보험료를 올려야 한다. 야당은 1.01%포인트를 올리면 된다고 주장하고, 정부와 여당은 두 배 이상을 올려야 한다고 맞섰다.
몇 퍼센트라는 수치가 문제가 아니다. 정부가 나서 국민연금의 보장성을 올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면서 국민들을 ‘협박’하는 형국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무엇에서 엇갈리는지 자세한 계산은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졌으니 생략한다.
요약하자면 기금이 2100년 이후에도 유지되도록 가정하는 것과 2060년에 고갈된다고 가정하는 것 사이의 차이가 크다(45년 또는 85년 후를 예측하면서 소수점 이하 퍼센트를 따지는 것의 ‘정치’는 더 묻지 않는다).
두 배 인상도 크게 과장된 것이다. 김연명 교수는 “정부 주장은 2083년에 17년 치의 적립금을 쌓아놓고, 기금 고갈 시점을 2100년도 이후로 무한 연기하는 데 필요한 보험료율이 (현행 9%의 두 배인) 18.8%라는 것“으로 해석한다 (프레시안 기사 바로가기).
복지부 장관 스스로도 두 배 인상 주장을 거둬들였다. 소득대체율을 10%포인트 올리는 데에는 3.5-4%포인트 정도의 보험료 인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한겨레 기사 바로가기). 두 배로 부풀린 진짜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사실 이 정도면 논의를 시작해 볼 만하지 않은가? 그러나 꺼내기 무섭게 복지부 장관이 ‘세대간 도적질’이라면서 말문을 막았다. 국민연금에 내장된 세대간의 형평(또는 정의) 문제를 가장 부정적이고 선정적인 형태로 불러낸 것이다. 국가의 책임은 한 순간에 세대 문제로 방향을 틀었다!
젊은 세대의 반응은 즉각적이다. “제대로 돌려받지도 못할 국민연금”, “젊은 세대들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것, “내 앞가림도 힘든데”. 좀 더 극단적인 분풀이도 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는 일부 노인의 지나친 행동을 국민연금과 연결시켜 싸잡아 비난하는 목소리가 넘친다.
한 여론조사에서도 세대간 차이가 뚜렷하다. 전체적으로는 더 내고 더 많이 받자는 데에 찬성하는 의견이 32%, 현행 유지가 54%인데 비해, 30대에서는 현행 유지가 66%나 된다 (갤럽여론조사 결과 바로가기). 직접 증거랄 수는 없지만, 한창 경제 활동을 하는 젊은 세대가 국민연금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세대간 도적질’이라는 발언은 원하는 목적을 이룬 셈이 되었다. 어느 순간 국가는 뒤로 빠지면서 국민연금을 두고 세대가 나눠지고 서로를 원망하는 것. 경제활동인구가 줄고 노인이 늘어날수록, 그리고 경제가 크게 좋아지지 않고 소득이 정체될수록 이 갈등은 아예 민낯을 드러낼 것이다.
갈등이 조직화되고 사회적 경로가 되면, 국민연금의 경계 안에만 있으란 법이 없다. 연금이 세대간 도적질이면 장기요양보험이라고 뭐가 그리 다를까. 젊은 사람들은 보험료는 꼬박꼬박 내면서도 혜택에서는 제외되어 있다(본래 제도의 취지대로다). 복지부 장관이 장기요양보험은 뭐라 부를지 궁금하다.
세대간 갈등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온갖 종류의 갈등, 나아가 새로운 투쟁이 사회적 연대, 구체적으로는 사회보장을 위협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한다. 연대에 기초한 사회보장의 핵심인 건강보험에서도 늘 건강한 사람, 젊은 사람들의 불만이 더 커질 수 있다. 소득이 많아 보험료를 더 내는 사람도 가만있지 않는다. “혜택에 비례한 부담의 형평성” 논리가 온 사회를 배회할 것이다(다름 아닌 민간보험과 연금의 논리!).
가장 불행한 시나리오는 사회보장이 최소화되고, 그리하여 사회 연대가 소멸하는 것이다. 설마 하겠지만 의외로 가깝다. 소득대체율 40%의 국민연금, 공적 재정 부담 60%의 건강보험은 개인이 40-60%를 보완해야 할 정도로 취약하다. 절반의 보호 장치가 국가의 자해행위와 만나면 더 쉽게 해체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공적 보호장치가 취약하니 각자 알아서 보완하라는 유혹은 차고 넘친다. 개인연금과 기업연금, 민간 건강보험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한국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열에 일곱, 여덟은 민간 건강보험에 가입해 있다는 것만 봐도 공포는 현실이다.
왜곡된 형평과 공정성을 내세워 갈등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연대에 기초한 사회보장이 스스로를 해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누가 더 부담하고 누가 더 가질지를 끝까지 따질 때, 궁극의 해결방법은 완전히 개인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던가. 내가 부담하고 내 몫을 챙기는, 바로 완전 시장 그리고 민간보험의 신화.
보험료 부담은 확실한 반면 미래의 보장성과 사회적 연대는 모호하고 추상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국민연금보다는 개인연금이, 건강보험보다는 민간보험이 내 손에 더 가깝다는 것도 틀림없다. 그래서 이 경쟁은 자칫 ‘각개 격파’와 ‘개인전’으로 귀결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은 사회다. 노후 소득이나 건강의 위험을 개인이 홀로 책임지기 어렵다는 것을 또 말해야 할까. 그 많은 나라들이 연금과 의료보험을 유지, 발전시켜 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은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다시 개인으로, 온전히 각자가 책임지는 쪽으로 가자니.
유독 세대간의 정의를 앞세우는 세력이 어떤 다른 정의와 형평을 말하는지 의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정의를 가장한 부정의라면 굴복할 수 없다. 세대간이든 소득계층간이든 마찬가지다. 정의롭고 공정한 부담과 혜택을 설계해야 마땅하지만, 그것이 당장 어렵다고 해서 원초적인 부정의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길이 틀렸다.
국민연금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용돈 수준에 지나지 않는 공적 연금의 소득대체율을 높이기 위해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사회보장을 해체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도적질이 아니라 연대를 말해야 옳다. 그것이야말로 세대간의 진정한 정의고 형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