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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년의 날, ‘꽃’ 대신 ‘백신’을 선물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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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격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프레시안 기사 바로가기)

백신 뒤에 숨어 있는 제약 회사의 전략

성년의 날이었던 지난 월요일, 꽃이나 향수 대신 딸에게 보다 특별한 선물을 하라는 신문 광고가 눈에 띄었다. 성년의 날 이벤트로 자궁경부암 백신을 할인하여 접종해준다는 어느 산부인과의 광고였다.

부모가 챙겨야 할 예방 접종이 어디 자궁경부암 백신뿐일까?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라면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챙겨야하는 예방 접종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실감할 것이다. 출생 직후 맞게 되는 B형 간염 백신을 비롯하여, 결핵, 디프테리아, 파상풍, 백일해, 소아마비, 뇌수막염, 폐렴구균 등의 백신을 생후 6개월까지 최대 3번에 걸쳐 접종해야 한다. 돌 이후에는 A형 간염, 수두, MMR(홍역/볼거리/풍진), 일본 뇌염 등의 백신을 추가로 접종해야 한다.

백신은 기본적으로 당장의 질병이 아닌, 미래의 질병 위험을 예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그 대상은 빈번한 감염 질환에서부터 암과 같은 좀 더 먼 미래의 위험으로 점차 확장되는 추세이다. 하지만 한 알만 먹으면, 혹은 주사 한방만 맞으면 모든 건강 위험과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그런 기적의 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질병들은 단일한 원인만으로 발생하지 않고, 여러 가지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문제는 이러한 미래의 질병 위험들이 점차 의약품의 관리 영역으로 포섭되면서 질병예방에 대한 책임과 관리가 개인에게 전가되는 방식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다는 점이다(사회학 등에서는 이를 ‘약물화(pharmaceuticalization)’라고 일컫는다). 그리고 이 배후에는 거대 제약기업들이 자리하고 있다.

ⓒ정연

2014년 <사회과학과 의학(Social Science & Medicine)>이라는 국제 학술 잡지에 실린 미국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교의 로라 마모와 노스웨스턴 대학교의 스티븐 엡스타인의 연구에서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들은 B형 간염 바이러스(HBV) 백신과 인유두종 바이러스(HPV) 백신(자궁경부암 백신)의 사례를 바탕으로 제약 기업의 약물화 전략을 밝혔다. 특히 제약 기업들이 백신을 개발하고 판매하는 과정에서, 두 바이러스의 감염 경로상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성적 접촉의 문제(sexuality)를 어떻게 표면화, 혹은 배제하였는지 심도 있게 분석하였다.

우선 B형 간염 백신을 살펴보자. 다국적 제약 회사 머크는 B형 간염 백신을 처음으로 출시하였을 때만 해도 정맥 주사 이용자, 동성애 남자, 성노동자, 보건의료 종사자 등과 같은 소위 고위험 집단을 마케팅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머크는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한 백신 광고를 내놓았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에이즈가 출현하면서, 남성 동성애자들이 제공한 혈액과 검체를 바탕으로 개발되었다고 알려진 B형 간염 백신에 대해 사람들의 공포와 거부감이 확산되었다. 백신을 맞으면 ‘게이병’인 에이즈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불안감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백신 접종률을 떨어뜨렸고, 더욱이 고위험 집단을 대상으로 한 예방 접종만으로는 높은 감염률을 떨어뜨리는데 한계가 있었다.

때마침 카이론이라는 다국적 바이오 회사에서 감염인의 혈액이 아닌 유전적으로 재조합한 효모로부터 단백 합성에 성공하면서 제2세대 B형 간염 백신이 시장에 등장하였다. 이후 해당 백신이 미국 질병관리본부에서 내놓는 신생아 예방 접종 목록에 포함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머크는 B형 간염 백신에 부여되었던 부정적인 섹슈얼리티의 이미지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한편, 인유두종 바이러스(HPV) 백신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성(sex)의 문제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전략을 폈다고 저자들은 밝히고 있다. 성적 접촉 외에 모자 수직 감염, 정맥 주사 등 그 감염 경로가 상대적으로 다양한 B형 간염 바이러스에 비해, 인유두종 바이러스(HPV)의 감염은 성적 접촉이 거의 유일한 원인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신을 출시한 머크는 해당 백신을 ‘성적 감염’을 예방하는 것으로 선전하기보다 ‘암’을 예방하는 백신으로 이미지화 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를 위해 성인 여성이 아닌 성경험이 없는 9~13세 소녀들을 주요 판매 대상으로 하였고, TV 광고 등을 통해 부모들이 딸의 암 예방을 위해 적극적으로 지갑을 열어야 한다고 주문하였다. 반면 HPV와 관련이 있는 다른 성 질환의 예방 효과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알리지 않는 전략을 폄으로써 섹슈얼리티의 이슈와 거리를 두고자 하였다.

즉, 제약 기업은 자신들의 의약품 판매를 위해 정치적 상황이나 문화에 따라 섹슈얼리티와 같은 특정 이미지나 인식을 백신에 부여하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배제하기도 하는 이중적 전략을 취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전략에 근거하여, 제약 회사들은 그 백신을 현재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아닌 언젠가 질병에 걸릴지 모를 불특정 다수를 마케팅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시장을 확대해가고 있다고 저자들은 꼬집었다. 그리고 이는 백신을 효과적으로 판매하고 백신에 대한 보편적인 접근성을 개선하는데 일부분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저자들은 제약 기업의 이러한 약물화 전략으로 말미암아 질병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고(백신만 맞으면 암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 오히려 질병 예방과 건강을 위한 다른 방식의 노력들, 예를 들어 자궁경부암의 경우 안전한 성생활을 위한 콘돔 사용이나 위생적인 환경, 조기 성경험의 억제를 위한 교육 등의 중요성이 간과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의약품 직접 광고의 위험은 바로 이런 맥락과 관련이 있다. 백신이 질병 예방에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과학적 진실이 사실 그대로 전달되기 보다는 이윤 논리에 따라 부풀려지기도, 감춰지기도 하는 상황 속에서 소비자들의 합리적인 판단과 선택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질병 예방은 의약품 하나만으로, 그리고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개인의 노력을 보완하는, 또는 그 토대가 되는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노력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백신 마케팅을 통해 드러나는 ‘개인주의’ 모형을 우리가 경계해야하는 이유이다.

성년의 날에 우리가 자녀들에게 진정 선물해야하는 것은 백신이 아니다.

참고 문헌

Mamo, L., & Epstein, S. (2014). The pharmaceuticalization of sexual risk: Vaccine development and the new politics of cancer prevention. Social Science & Medicine, 101, 155-165.

정연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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