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반복되는 일자리 정책, 준비된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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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자리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청년 실업이 심각하다고 한지가 언제며 비정규 노동을 시비한 지가 도대체 얼마인가. 오죽하면 삼포세대니 열정 페이니 하는 노동의 특징이 한 시대를 풍미하는 유행어가 될까.

시대의 불안이 이런 만큼, 정부도 일자리 만들기, 그 중에서도 청년고용이라는 과제를 외면하기 어렵다. 지난 27일 정부가 ‘청년 고용절벽 해소를 위한 민관합동 대책회의’를 통해 ‘청년 고용절벽 해소 종합대책’을 발표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보도자료).

정부의 시각으로는 노력을 많이 했다고 하겠으나 반응은 심드렁하다. 사실 처음부터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 일자리 정책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 때마다 내용이 비슷하고 비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절벽’이라는 감성적(?) 언어와 ‘종합’이라는 덧붙이기로는 역부족이다.

내용이 부실한 것은 당연하다. 일자리 가운데 절반 이상이 인턴과 직업훈련 등 불안정한 일자리라고 하니, 부실을 넘어 속임수에 가깝다. ‘강소·중견기업’ 인턴이라는 일자리 7만5천 개는 근무기간 3개월에 월 60만원을 받는 것이란다. 무슨 대책이라고 할 만한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내용도 이상한 것이 많다. 청년을 신규 채용하면 인건비 일부를 지원한다는데, 그 정도 인센티브로 고용을 늘릴까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믿지 않을 것이다. 2만 명을 직업훈련 시킨다고 하지만 어디서 누가 훈련을 시킬 수 있는지도 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일자리에 보건의료 분야가 빠질 리 없다. ‘포괄간호서비스’를 확대해서 2017년까지 1만 명의 간호 인력을 확충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보도자료의 참고자료에는 ‘야간전담 간호사’ 수가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관련 기사), 논쟁적인 야간전담 간호 제도의 도입도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참고로, 우리는 야간전담 간호제도의 도입을 절대 반대한다).

포괄간호서비스란 간호에 필요한 모든 입원서비스를 병원이 제공한다는 것으로, 보호자 없는 병원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하기 쉽겠다. 이제 막 시작하는 정책을 전국에서 시행한다고 못 박은 것도 용감하고, 뜬금없이 공공부문 일자리라고 주장하는 것도 심상치 않다. 메르스 유행 때문에 간병 문화를 바꾸자는 목소리가 높았던 것이 새로운 기회인가. 본래는 병원의 간병 인력과 시스템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 논의해야 하는데, 어느새 청년 고용을 늘리는 정책에 종속되게 되었다.

보건의료 부문에서는 고용이 본래 정책의 목표를 왜곡시킨다는 비판이 높다. 게다가 백화점식으로 대책을 모아 놓았으나 고용 정책 그 자체의 효과(고용 증대)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 쪽도 찾아보기 어렵다. 매번 부실, 비현실적, 재탕 삼탕이라는 비판을 받는데 이번에도 모양새가 비슷하다. 정부 당국의 무능 때문인가 어떤 구조적 이유가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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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우리는 현재의 고용 정책이 겉으로만 일자리를 내세울 뿐 실제 목표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어떤 경제 정책도 어느 정도까지는 그렇지만, 그 가운데서도 고용 정책은 사회경제적 권력관계를 직접 반영하고 따라서 정책의 기술적 측면이 아니라 정치의 구조가 작동한다.

게다가 고용 정책은 현실 정치의 정략에 직접 봉사한다. 자본주의 체제에 결합된 개인의 삶이 걸려있는 만큼, 일자리 정책은 정치·경제의 배후에 있는 권력관계뿐 아니라 현실 정치의 이해관계를 민감하게 반영한다. 청년 고용 ‘20만’을 내세우는 이번 대책 역시 청년층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겠다는 정치적 목표가 작동했을 것이다.

결국 고용 정책은 고용 그 자체 또는 경제가 아니라 정치이며, 고용 정책의 목표는 고용과 경제를 넘어 정치로 이어진다. 목표를 다시 정의하면 정책의 성공과 실패도 전복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말하는 대로 이번 고용 대책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정치의 실패가 아닐 수도 있다. 실패의 가능성 정도가 아니라, 고용 정책으로서는 실패를 각오하고 있는 것, 한 걸음 더 나아가 혹시 실패를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닐까.

 

고용의 실패와 정치의 성공. 우리는 자본주의(특히 신자유주의) 국가에서 고용과 일자리가 어떤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주목하고자 한다. 국가의 통치술(통치 합리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적절한’ 규모의 실업과 비정규 노동은 불가피할 뿐 아니라 (심지어) 바람직한 것이기도 하다. 통치술의 이해관계에 완전히 부합하기 때문이다.

청년들과 대학이 어떻게 스스로를 훈련하고 바꾸는지를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각자 ‘품행’과 능력을 준비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 더 이상 국가가 나서서 힘들게 그들의 ‘일탈’을 처벌하고 훈육할 필요가 없다(취업의 전설로 이야기하는 1980년대와 비교해 보라). 스스로가 내면까지 변화하며 또한 스스로를 탓한다. 이보다 쉽고 효율적인 통치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으로 끝이면 더 이상 고용에 대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으나, 신자유주의 국가에서 노동과 고용은 필시 양면성을 갖는다. 청년 실업과 비정규 노동이 효율적인 통치를 가능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한도 끝도 없이 방치할 수는 없다. 지나친 실업과 비정규 노동이 많은 사람들의 ‘복리’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를 때가 문제다. 불안과 불만이 커지고 결국 사회의 안정을 위협하면 국가의 통치는 또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의 고용 문제는 통치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그냥 두면 일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회적 병리 현상을 드러낼지 모른다. 통치의 효율성 때문에라도 더 이상 안정성을 무시하기는 어려워진 것이다. 고용 정책이 곧 정치라고 할 때, 그것의 정치적 원리는 이 지점에서 성립한다. 사회적 불안정의 (부분적) 완화.

사회적 안정성을 높인다면 고용 대책은 국가의 진정한 관심사가 될 수 있지만, 구조적으로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택할 가능성은 아직 낮다. 통치의 불안정을 완화할 수 있는 많은 수단이 남았다는 또 하나의 정치. 당장 청년고용은 정규직의 임금 피크제와 쉬운 해고, 크게는 노동 개혁이라는 정치 또는 정략과 결합하지 않았는가. 일자리 만들기가 아니라 일자리 뺏기(좋게 말해 양보나 나누기)가 정치적 프레임의 핵심 요소다.

거듭 강조하지만, 정치로서의 고용 정책은 청년고용과 비정규 노동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일차 목표를 두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고용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야기하는 사회 불안정(통치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을 해소하는 것이 앞선다.

 

핵심 대책으로 들어간 ‘포괄간호서비스’ 확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시민의 필요와 요구를 충족하는 보건의료정책이 아니라, 사회의 불안정을 완화하는 통치술의 한 가지 방법으로 소비된다. 정책 그 자체의 시민적 의의를 달성하는 것은 당연히 기대할 수 없다.

장담하건대, 앞으로도 고용 정책은 (절반은 의도적으로) 실패를 거듭할 것이다. 이런 사정은 청년 실업과 비정규 노동의 불안정성이(그리고 다른 어떤 통치의 전략이라도) 통치를 위협할 정도로 실질적 힘을 가질 때라야 달라질 수 있다. 여기가 바로 다른 관점의 고용 정책이 출발하는 지점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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