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연구통

불평등은 수면을 잠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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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격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프레시안 기사 바로가기)


 흔히 낮에 깨어나 활동하고 밤이면 잠자리에 드는 것을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지구 자전 주기와 조화를 이루는 인체의 생체 시계가 그렇게 진화해온 탓이다. 잠은 비단 인간뿐 아니라 대부분의 생물에서 뇌와 신체 기능의 휴식, 회복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에게 잠은 심리적으로나 생리적으로 회복 탄력성의 중요한 원천이면서, 동시에 휴식 이상의 의미도 갖는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이 잘 그려낸 것처럼 잠을 자는 동안 학습과 기억이 강화되며, 단백질 합성, 호르몬 분비, 자율 신경계 조정 등에도 잠은 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잠은 그저 개인의 습관, 심지어 아깝게 낭비되는 인생 시간으로 간주되고는 한다. 의학이나 공중보건에서 잠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기 시작한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양적, 질적 측면에서 잠이 충분치 못할 때 수행 능력 저하는 물론 교통사고와 산업재해 같은 안전사고, 기분 장애, 고혈압, 비만, 유방암과 대장암 등의 위험이 증가한다는 보고가 잇따르고 있다.

올해(2015년) 3월 하버드 의과대학과 카이저 재단 연구소의 잭슨 교수 팀이 <공중보건 연례 종설(Annu Rev Public Health)>에 발표한 논문은 특별히 잠의 불평등 문제에 주목했다. 인종적 혹은 사회 경제적 조건에 따라 나타나는 심혈관 질환의 불평등이 수면 불평등과 관계있다는 것이다. 이 논문은 심혈관 질환의 사회 경제적 불평등, 수면의 사회적 결정 요인, 수면과 심혈관 질환을 연결하는 생리적 기전에 관한 기존의 연구 연구 결과들을 종합했다. (☞관련 자료 : Sleep as a potential fundamental contributor to disparities in cardiovascular health)

사실 심혈관 질환의 불평등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아래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대개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을수록 심혈관 질환의 발생률이나 그로 인한 사망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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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 자치구별 심장 질환 사망률(2009~11년). 서울특별시와 이화여자대학교 산학협력단이 실시한 <2013 서울시 건강 격차 모니터링> 결과다.

그런데 심혈관 질환 발병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요인들이 수면의 양이나 질과 관계가 있다. 대표적으로, 수면 부족은 체중 증가와 비만을 야기하며, 고혈압, 당뇨병 발병 위험을 높인다. 예컨대 수면 이상은 그렐린이나 렙틴 같은 식욕 조절 호르몬에 영향을 미쳐서 배고픔을 느끼게 만들고 열량 섭취를 증가시킨다.

(시민건강증진연구소에서 시행한 인터뷰에서 야간 전담 의료 기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관련 자료 : <한국 보건의료 부문의 근로 시간 형태와 그 영향 2015>)

“잠을 잘 못 자게 되니까 우울해지고 그 다음에 또 그렇게 퇴근한 날 푹 자버리면 저녁에 낮에 아무것도 안 먹고 자버리니까 일어나서 또 폭식을 하고 식습관에도 영향을 미치고. 네, 그런 걸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나중에 분노도 좀 조절이 잘 안되고. 네, 화가 조금만 나도 신경질적으로 내게 되고 사람이 되게 예민해지고 부정적이 된 것 같아요. 정말 저는 성격이 참 이상해진다. 나이트 하면은 성격이 이상해진다 이런 얘기를 막 선생님들한테, 제 위에 선생님들한테 제가 막내로 일할 때 선생님 저 요즘 계속 성격이 이상해지는 것 같다고 그랬더니 나이트하면 원래 그렇게 된다고.” )

수면 박탈 상태인 사람의 뇌 영상을 찍어보면, 보상적 행동과 관련된 부분이 활성화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수면 부족 때문에 피로감을 느끼면 당연히 운동 같은 신체 활동이 줄어들고 이는 결국 체중 증가로 이어진다. 15편의 논문을 종합한 분석 결과에 따르면, 수면 시간이 짧아질 경우 관상동맥 질환 위험이 정상 수면에 비해 약 1.5배 증가하고, 뇌졸중 위험도 1.2배 증가하였다. 또한 중등도 이상의 수면 무호흡증은 심혈관 질환 위험을 30%나 증가시켰다. 한편, 지나치게 긴 수면 시간도 역시 문제를 일으켰다.

문제는 잠이 그저 개인의 습관이나 선택이라기보다 사회 경제적 조건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잠의 사회적 분포는 심혈관 질환의 사회 경제적 불평등을 설명하는 중요한 기전이 된다. 잭슨 교수 연구팀은 개인 특성부터 사회 제도적 요인까지, 수면 불평등의 결정 요인들을 검토했다.

우선 생활양식 측면에서, 사회 경제적으로 취약한 조건에 처한 경우 영양 불량, 신체 활동 부족, 음주, 담배 연기에 더 많이 노출된다. 이들은 모두 수면의 질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다. 또한 물리적 환경 측면에서, 가난한 동네에 사는 경우 소음이나 빛 공해, 대기 오염 물질, 범죄 같은 요인들에 더 많이 노출된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 특히 어린이들의 경우 가족의 영향이 매우 중요하다. 바람직하지 못한 양육 스타일, 가족의 질병이나 사고, 부모의 우울증, 부모의 야간 교대 근무, 가정 폭력 같은 것들은 자녀의 수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또한 (인종) 차별 경험도 수면 중단, 깊은 잠에 들기 어려움, 일과 중 피곤함과 관련이 있었다.

보다 거시적인 요인들도 잠의 불평등을 초래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용 조건과 근로 환경이다. 실업은 물론, 교대 근무, 장시간 연장근로, 직무 스트레스가 수면의 양과 질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근로 환경은 대개 저임금 생산직이나 서비스직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자영업자들의 몫이다.

반면, 사회 제도는 수면 문제를 완화시키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예컨대 등교 시간을 늦추면 학생들의 수면 시간도 늘어나고 교통사고가 감소하며 학교 출석률도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들이 존재한다. 또한 24시간 운영을 피할 수 없는 병원의 경우, 전공의들의 주당 최대 근무 시간을 제한한 결과 이들의 건강과 안녕은 물론 환자 안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도 있다. 소득이나 재산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불평등은 수면의 양과 질에도 영향을 미치며, 바람직한 제도는 이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관련 자료 : 무엇을 위해 잠자는 시간 조절하나)

사실 인간의 생체 시계가 이토록 혼란을 겪게 된 것은 인류 역사에서 보면 매우 최근의 현상이다. 지구상에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것이 약 20만 년 전인데 비해,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고 오늘날의 365일/24시간 체제 자본주의가 정착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50년이다. 하지만 사회적 시계가 생체 시계보다 점차 큰 힘을 발휘하는 듯 보인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페미니즘의 명제는 수면에도 적용된다.

사회 불평등은 우리의 수면을 잠식하고, 이는 더 큰 건강 불평등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건강하게 잠잘 권리, 잠의 평등권을 요구해야 한다.

김명희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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