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제3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 시안’을 발표하면서 저출산 대책이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정부 보도자료). 공청회와 당정협의를 하는 단계라지만,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정책들이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린다.
조롱과 비웃음거리가 된 것이 벌써 여럿이다. 빨리 사회에 진출하도록 초등, 대학 과정을 1년씩 줄인다거나 단체 미팅을 주선한다는 계획은 황당할 정도다(바로가기). 고용과 주거가 결혼과 출산을 가로막는다고 진단했지만, 대책은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개혁’과 같이 재탕 삼탕 아니면 견강부회가 대부분이다. 정책효과도 문제지만, 신뢰를 얻는 것이 더 걱정스럽다.
정부도 곤혹스러울 것으로 짐작한다. 10년간 100조 원을 쏟아붓고도 실패했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까지 추진해 온 정책을 답습했다는 비판, 그리고 ‘대전환’을 할 수 있는 ‘한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새로 내놓을 것이 남았는지 모르겠다.
당정협의를 비롯해 의견을 더 수렴한다고는 하나, 비관적이다. 할 수 있는 것을 일부러 숨겨 놓았거나 갑자기 무슨 아이디어가 뚝 떨어질 리 만무하다. 머리를 짜도 이미 발표한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정부도 답답하리라.
기왕 변호하는 마당에 더 보태자. 정부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주관해서 계획을 다시 만들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학계나 기업, 언론, 사회단체도 좋은 방안이 있는데 일부러 숨기지는 않았을 터. 한국 사회 주류가 생각하는 저출산 정책의 좁은 틀, 익숙한 생각과 실력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적극적 이민정책을 고려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니 조금은 나아진 것인가. 한 걸음 , 나아간 의견이고 앞으로 검토해야 할 것은 맞다. 문제는 그만큼 새로운 것인가 하는 점에다(아예 처음 나온 대책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민정책이 저출산을 해결하는 묘책이 될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방식을 바꾸고 강도를 높일 것을 주문하는 목소리도 높지만, 저출산 대책은 종합적이고 통합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전부터 많았다. 정부의 의지가 중요하고 정책의 강도가 높아야 한다는 지적도 새롭지 않다. 새롭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정부가 저출산 대책을 추진한 이후 10년도 넘게 계속되는 익숙한 주장이다.
새로운 것이 없고 전망도 어둡다면, 10년 뒤에도 지금의 실패를 되풀이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는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고 목표를 달성할 것 같지 않으니 비관적이다.
(아마도 유일하게) 남은 방법은 좀 더 근본적이고 때로 급진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추세를 바꾸기는커녕 작은 효과도 얻기 어렵다. 근본적이라 한 만큼 크게 보고 멀리 봐야 한다. 정부가 실무로 풀기에는 불가능하니, 사회 전체가 같이 고민할 과제기도 하다.
첫째, “저출산이 왜 문제인가”에 대한 답이 분명히 해야 한다. 정책의 배경과 동기가 명확하지 않으면 정책이 헛발질하는 것은 당연하다. 공무원들이 말하는 대로 하면, 정책 집행 과정에서 순응도가 떨어지고 결과적으로 정책 효과는 약해진다.
지금 상태는 어떤가. 한번 예정된 경로에 들어선 후 누구도 묻지 않는다. 저출산은 왜 문제인가? 인구가 줄어 ‘국력’이 약해지는 것? 경제활동인구가 줄어 경제 활력이 떨어지는 것? 노인 부양의 부담이 늘어나는 것? 아니면,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바람직한데, 연착륙을 못 하는 것? 정책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얼버무리지 말 것. 무엇이 초점인가에 따라 정책은 달라진다.
저출산은 결국 적정 인구의 문제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인구밀도를 가진 나라라고 가르쳤고, 현재도 그렇다. 위키피디아에서 정리한 자료를 보면, 전체 국가 가운데 23번째로 인구밀도가 높다(바로가기). 도시국가는 빼고 인구 천만 명 이상의 국가로는 방글라데시와 타이완에 이어 3위다.
<인구쇼크>를 쓴 미국의 저널리스트 앨런 와이즈먼은 우리의 관심과 달리 인구감소가 지구와 인류를 지속시킬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이한음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펴냄. 프레시안 서평 바로가기). 이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지, 그리고 ‘적정’이 도대체 어느 수준인지는 제쳐 두자. 다른 것은 몰라도, 세계 최고 수준의 인구밀도와 황폐한 삶의 환경을 생각하면 그의 주장을 마냥 무시하기 어렵다.
극심한 청년 실업과 세계 최고의 경쟁은 인구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것인가. 인구가 줄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더 적은 인구가 삶의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한 번쯤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저출산 ‘극복’이라는 목표가 우리의 미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다시 묻는다.
대전환이 필요한 둘째 이유는 어떤 의미에서는 좀 더 경험적이다. 온갖 정책과 대책, 분석과 걱정을 뜯어보면 금방 깨닫는다. 출산을 사회와 그 구성원이 지향하는 가치와 연관된 것이 아니라 다른 가치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 실제 의도는 그렇지 않으리라 믿지만, 그렇게 인식되거나 보이는 경우가 많다. 가치는 배제되고 출산은 ‘도구’가 된 것이다.
경제, 성장, 국력, 노인 부양, 지속가능성, 그 어떤 이유를 동원해도 마찬가지다. 애를 낳고 기르는 것이 이런저런 사회 문제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그래서 국민이 해야 할 도리이자 의무인가. 셋째 애를 가졌다고 하면 애국자라 한다는 소리, 우리가 무슨 애 낳는 기계냐는 항변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도구로서의 출산이라면, 삶의 가치가 전복된 것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의 저출산 정책은 전형적으로 ‘물화’되고 왜곡된 것이다. 예를 들어, 국가가 보육을 지원하는 것이 애를 더 많이 낳게 하려는, 즉 저출산 대책에 종속된 정책이 되어서는 안 된다(실제로는 그마저 못하지만). 개인으로나 사회로나 애를 잘 키우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하므로 협력하는 것이다.
목표가 명확하지 않고 가치가 전도되어 있을 때는 어떤 명약이라도 효과를 보기 어렵다. 사실, 우리 대부분이 이미 알고 있다. 이런 식으로는 어떤 저출산 대책도 뚜렷한 효과를 보기 어렵다는 것을. 3차 기본계획이 아니라 5차, 6차까지 가도 이대로는 어렵다. 그러니 더는 예산을 낭비하지 말 것.
두 가지 이유 모두 거시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다. 저출산을 보는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실천하기 쉬워서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만 아는 무슨 비책 같은 것도 따로 없다. 다만, 전면적으로 수정하고 기초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안다.
지금이라도 도구가 아닌 가치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 정책으로 좁혀도 마찬가지다. 저출산을 극복하기 위한 것(대증요법)이 아니라 사람이 살 만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정책과 대책(기초체력 강화)에 더 집중하라. ‘저출산 대책’이라는 정책을 아예 폐기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전면적인 재설계를, 그리고 그를 위한 논의를 시작할 것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