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백투더퓨처 2>가 묘사한 미래는 2015년이었다. 영화 소재가 된 날(10월 21일)을 전후해 세계적으로 상업성 기사나 행사가 이어졌고, 한국 사람들의 관심도 덩달아 커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도 있었다. 영화에서 묘사한 2015년이 지금과 얼마나 가까울까 하는 것. 몇몇 언론의 ‘평가’를 종합하면, 비행 자동차나 초 단위의 일기예보, 크기가 저절로 맞는 옷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전자 안경이나 3차원 영화는 제법 비슷하게 맞았다고 한다.
꼭 영화가 아니라도 미래 예측은 큰 관심 대상이다. 보통 사람에게는 얼마나 맞았나 하는 것이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라면, 한국에서도 그만한 일이 없지 않다. 좀 더 진지하고 엄숙한 모양을 갖추었다는 것이 <백투더퓨처 2>와 다른 점이긴 하다.
한국미래학회가 정부의 의뢰를 받아 2000년의 한국을 예측한 때는 1970년이었다. 「서기 2000년 한국」 연구에는 1969~1970년에 걸쳐 1,060명의 전문가가 참여했다고 한다. 한국 최초로 델파이 연구방법을 쓴 과학적인 연구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예측은 맞은 것도 있고 엄청나게 오판한 것도 여럿이다(원 보고서를 구할 수 없어 내용은 1970년과 2000년 무렵의 여러 언론보도와 관련 글을 참고했다). 주로 과학, 기술 발전과 사회제도 변화에서 빗나간 것이 많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서울-부산을 1시간에 달리고 김포-뉴욕을 5시간에 비행할 것이라 했지만, 지금까지도 간격이 크다. 뭐니 뭐니 해도 차이가 가장 큰 것은 컴퓨터 보급이다. 1990년에 3천 대, 2000년에 1만 대의 ‘전자계산기’가 있을 것으로 예측했으나, 컴퓨터는 2000년 초에 벌써 400만 대를 넘었다.
이런 것도 많이 틀렸다. “2000년까지 고등학교 의무교육이 시행되고, 대학 입시제도가 없어지며, 매년 4주의 유급휴가가 일반화된다.” 틀린 것 그 자체보다는 틀린 이유가 궁금하다. 과학기술이야 쉽게 이해가 되지만, 사회정책이나 제도, 사회적 삶의 변화를 예상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가벼운 흥미를 빼면, 이렇게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1970년 당시의 작업에 국가가 깊게 개입했다는 것이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30년 후 미래를 말하는 것은 예측하는 것인가 의도하는 것인가. 미래 예측과 예측된 미래는 어떻게, 그리고 왜 현재에 개입하는가.
우리는 미래 예측이 현재를 위해 의도적으로 소비되고 활용되는 측면에 주목한다. 이런 목적의 미래 예측은 당연히 정치적이고, 흔히 정략을 위해 소모된다.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60년까지의 ‘장기재정전망’이 가장 최근의 사례다.
우선 짚을 것은 2060년이라는 시간 프레임. 보통은 엄두를 내지 못할 것 같은데(앞에서 말한 미래 예측도 겨우(!) 30년이었다), “국가의 중심”을 자부하는 기획재정부답게 ‘스케일’이 크다. 올해 처음 그런 것도 아니니, 이유가 있을 것이다. 국가와 사회의 미래를 걱정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12월 4일 내놓은 보도자료는 비교적 온건한 제목(“기획재정부, 2060년까지 국가채무비율 40% 이내로 관리”)을 달고 있다(바로가기). 하지만 제목만 그럴 뿐, 내용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충분히 급진적이고, 단정적이며, 편향되어 있다.
‘장기재정전망’의 정치는 정치성을 숨기는 데서 시작한다. 예산의 정치가 본래 그렇지만, 장기재정전망 역시 숫자의 과학을 표방한다. 기획재정부의 보도자료에 들어있는 표현이 주장하려 하는 것이다. 전망은 “관련 전문가 27명으로 구성된 민관합동 장기재정전망협의회 (위원장 재정관리관)에서 지난 1년간 실무작업을 한 결과임”.
정확하고 객관적인 ‘팩트(사실)’에 도전하지 말라는 엄포다. 과연 그럴까. 2060년은 지금부터 45년 후다. 지금부터 45년 전은 1970년이다. 이것 때문에 앞에서 1970년의 미래 예측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기술적 예측으로 환원되지 않는 미래는 얼마나 불안정하고 불확실한가.
경제와 사회의 바탕이 되는 미래인구 추계조차 5년마다 춤을 추는 형편이다. 통계청이 2010년 기준으로 작성한 인구추계는 5년 전 작성한 추계에 비해 2050년(40년 후!) 인구가 500만 명 이상 차이가 난다. 출생률, 기대여명, 국제이동 등이 변하기 때문이다. 재정전망에는 이보다 더 예측하기 어려운 경제 상황, 국제 요인 등을 보태야 한다. 게다가 정책, 제도, 사람들의 대응 등 ‘사회적’ 요소까지 들어가야 하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장기재정전망은 현재 정치에 직접 개입한다. 팩트라고 전망을 발표하는 것만으로 현재를 바꾸는 동력은 충분하다. 언론이 그대로 받아 적고 제 생각을 보태 뽑은 제목을 보자. “국민연금 2060년 완전 고갈”, “건강보험 2022년부터 적자”, “씀씀이 안 줄이면 나랏빚 폭증”, “국가채무, 2060년 GDP 대비 60% 넘어”, “저성장, 고복지 지속 땐…”, “복지 이대로 가면…”, “포퓰리즘 복지 계속 땐…”
누가 경제성장에 이의를 달고 복지 확대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장담하건대,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모든 복지 확대 제안과 정책은 “재정 건전성은 고려하지 않는” 포퓰리즘으로 공격을 받을 것이다. 미래가 현재에 개입하는 정치이고, ‘장기재정전망’이 현실에 개입하는 정치다.
그것이 명백히 정치적 실천이라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다른 전망을 내는 것은 기술, 객관성, 정확성의 프레임에 갇히는 지름길이다. 대항 정치의 하나는 재정 수입, 곧 세금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줄로 믿는다.
‘재정 건전성’의 허구와 이를 선동하는 위선을 드러내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중요하다. 마침 딱 맞는 예가 있다. 지금의 경제부총리가 경기부양용 돈 풀기에 앞장서고 말로만 재정 건전성을 내세웠다는 비판은 소수 의견이 아니다. 오죽하면 한 보수 언론조차 이런 사설을 썼을까. “지역구 예산 500억 챙긴 최경환, 2060년 재정 걱정되나” (동아일보, 2015년 12월 5일).
우리가 계속 물어야 할 것. 어디에 쓰려고, 그리고 무엇을 깎으려고, 재정 건전성을 말하나?